2013년 6월 13일 목요일

교회 공동체의 시작(12/3/13)

교회 공동체의 시작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 공동체중 아마도 안디옥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일것같기도하다. 그 안디옥교회의 시작은 "몇 사람" 평신도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의 만남 이것이 역사적 만남입니다. 바울은 왜? 다소에 있었을까? 예루살렘교회로 가지 못하였을까? 다소는 바울의 고향이다. 바울을 품지 못했을까? 상처...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사역지를 정하고 바울을 만나서 같이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였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바울 또한 없었을수도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공동체의 탄생은 결코 위대한 사람들이 시작이 아니라 이방인을 전도한 평신도 "몇사람"과 바울을 품었던 바나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교회를 핍박한 바울... 그는 초대교회의 가장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 주역이되었다. 나는 주역인가? 주적인가? ㅋㅋ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19, 20, 25, 26 KRV)

잠잠하지 않을 이유(12/3/13)

잠잠하지 않을 이유

우리는 사명을 다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대적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하여도 담대히 사명을 다한다. 우리가 묵묵히 사명을 감당할 이유가 어디있을까? 간혹 우리는 본질을 놓칠수도있다. 교회에는 이벤트가 많다. 근데 왜 해야할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이 성중에 내 백성이"... 여기에 진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18:9, 10 KRV)

폐하여지는 것 (13/3/13)

폐하여지는 것

없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유욘했지만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로 하늘에는 해가 필요없다. 하나님이 빛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은사중에 하늘나라에서 필요없는 것들도 있다. 이런것을 바울은 부분적인것들 어린아이의 일이라고 했다. 이젠 조금더 오래 유용한 것에 집중하는 현명함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말씀? 사랑? 믿음? 제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8, 10, 11 KRV)

믿음(바울) vs 믿음(야고보)(15/3/13)

믿음(바울) vs 믿음(야고보)

재미있는 주제이지만 교회를 다니다보면 꼭 언젠가? 이 질문이 부딛힌다.
스스로 답을 찾아봐야할 문제이다. 개인적으론 바울은 창세기 15장을 가져왔고 그곳에 분명 "의"가 나온다.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에서 순종이후의 축복을 말하는것같다. "의로움" 만 본다면 바울의 말이 조금더 나에게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ㅋㅋ 성경은 믿는것이디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ㅋㅋ

바울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로마서 4:2, 3 KRV)

이본문은 구약 창세기 15장을 가져온것이다.
...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4-6 KRV)

야고보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1, 22 KRV)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을 인용하였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 22:16-18 KRV)

그날 (16/3/13)

그날...

그날에 정확히 무슨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로마서에서는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에는 우리를 밤낮 참소하던자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수 없습니다. 그날엔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모든 권세가 무릎꿇는 날일것입니다. 그날을 나는 기대하고 있나요?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요한계시록 12:10 KRV)

위로(16/3/13)

위로.

바울은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하십니다. 바울은 나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깨닫게됩니다. 하나님이은우리가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자들인것을 아쉽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아마도 위로라는 선물을 주시기위함이 아닐까요? 위로의 선물은 고난받는 자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닐까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KRV)

열려있는 하늘나라(16/3/13)

열려있는 하늘나라

Paul Washer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전하신적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인간이 하늘나라 문앞에섰다. 그리고 명하기를 "문들아 머리들어라" 천국의 문이 열리고 완전한 한 사람이 그 문으로 들어가셨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설교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천국의 성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그 천국문을 열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요한계시록 21:25 KRV)

물이 땅을 덮음같이(16/3/13)

물이 땅을 덮음

노아 홍수때 물이 땅을 덮었다. 이사야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을 충만케 할것인가? 물이 땅을 덮음으로 모든 생명이 죽었다. 지금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었다. 생명되신 예수님을 만나면 다시 산다. 오직 유일한 살길이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이 충만할때는 예수님이 재림할때이다. 그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때를 예비하자.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창세기 7:19 KRV)

계시록 마지막절(16/3/13)

계시록 마지막절

모든자에게 예수님의 은혜가...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everyone. (Revelation 22:21 GNB)

"everyone" 왜? 요한은 믿는자라고 아니하고 모든자라고 했을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사람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합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 21 KRV)

부르심(75세)과 응답하심(100세)(16/3/13)

부르심(75세)과 응답하심(100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응답을 하신때까지 걸린 시간이 25년이다. 참 오랜 시간이다. 11년간 기다리면서 아브라함은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려고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14년후에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을 완성시킨다. 나는 기다릴까? 아님 나의 방식으로 이룰려고할까? 나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 그걸 어떻게 분별할수있을까? 참 어렵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창세기 12:4 KRV)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 (창세기 16:16 KRV)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창세기 21:5 KRV)

대신함의 은혜 (16/3/13)

대신함의 은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제물은 어디에 있나요?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셨을거라고... 사실 그 번제물은 이삭이다. 히브리서에서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분명 죽일려고한것 같다. 그는 부활의 신앙을 가졌다.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예비한 숫양으로 응답하셨다. 그리고 이삭은 살았다.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뒀던 아브라함, 아픔과 고통으로 산을 올랐을 아버지 아브라함...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골고다길을 걸을때... 하나님 아버지도 함께 걷고 계셨겠지... 우리에게 살길을 여시기위해... 아들을 잠시 외면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아브라함은 느꼈을것같다. 언제쯤 십자가의 사랑이 나에게 찐하게 다가올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22:8)

다툼에서 옮김으로(17/3/13)

다툼에서 옮김으로

말도 안되는 상황이 이삭에게 벌어졌다. 두번이나 우물을 빼았겼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옮겼다. 그에게 무엇이 다툼을 피하게 했을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약속을 믿음 이삭 그는 다툴 이유가 없다. 고난이 인도라고 받아드렸던것같다. 나는 다툴것인가? 옮길것인가?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세기 26:22 KRV)

몇날 vs 이십년(17/3/13)

몇날 vs 이십년

사람은 미래의 일을 알지못한다. 인생이 그렇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피신시킨다. 몇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십년이되었다. 야곱의 마음을 빼았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인생이 그렇다. 나그네는 마음을 빼았기면 안된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서.... 그러나 소망한다. 본향으로 언젠가 돌아가겠지... 야곱은 이십년이 지나서 다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이신 하나님께로 오늘도 한걸음 나그네처럼 본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살아야하지만 늘 마음을 빼앗기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ㅜㅜ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창세기 27:43, 44 KRV)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창세기 31:41 KRV)

나의 가는길에서 함께하신 하나님(17/3/13)

나의 가는길에서 함께하신 하나님

야곱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이시요 나의 삶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그의 삶의 길이 결코 평탄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삶의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힘들때도 기쁠때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할것같습니다. 나는 기쁠때만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것같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함께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 입술이되길 바래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세기 35:3 KRV)

열린(삶)예배(17/3/13)

열린(삶)예배

우리는 이미 정해진 순서에의해서 정해진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 우리가 무엇을 드려야할지 고민하고 그것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일상 삶속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인지 고민하는것 그것을 하나님은 받으실거라 생각한다. 모세가 바로왕에게 말한다. 모든것을 가져가지만 그중에 무엇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나님은 모든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지 아니하고 그중에 하나를 드려도 전부를 받은것으로 여기지 아니할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모든것을 하나님께 가져가야하는것이고 그중에 드릴것은 하나님께 선택권을 드린 삶을 살아가는것... 쉽지않다.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출애굽기 10:25, 26 KRV)

하나님을 시험하기(18/3/13)

하나님을 시험하기

신앙생활중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한다고 생각할수있지만 실은 우리가 종정 하나님을 시험한다고도 할수있다. 과연 내 인생에 하나님의 간섭함있는가? 이렇게 고민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없을것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어 하나님을 모세를 원망한다. 어쩌면 아주 정상인 모습이다. 우리 지체들과의 모임속에 삶의 필요를 나누는 것도 어쩜 아주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적필요에 대하여 말하는것에는 인색하다. 나는 삶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러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 알기를 원함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가?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7:7 KRV)

불과 구름(18/3/13)

불과 구름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땐 불과 구름을보고 따라갔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디 않으면 움직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쩌면 이 불과 구름은 하나님 말씀같습니다. 오늘 내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지 아니하면 내가 하루를 살수없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매일 아침마다 큐티를 ㅋㅋ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출애굽기 40:37, 38 KRV)

부정한자(18/3/13)

부정한자

레위기는 부정한것과 정한 것을 많이 이야기한다. 문둥환자도 부정한자이다. 이 사람은 마음을 떠나서 살아야했다. 그리고 입으로 "부정하다" 외치고 살아야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오지 못하게 한것같다. 예수님은 이들을 만났다. 보여지는 문둥병은 사람들이 인식하지만 영적인 문둥병은 인식할수없다. 나는 육적 문둥병보다 더한 영적문둥병자가 아닐까? 나의 영혼에 예수님이 날마다오셔서 나의 문둥병을 고쳐줬으면 좋겠다. 나는 어쩌면 속으로 날마다 이렇게 외쳐야하지 않을까? "부정하다" "부정하다"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레위기 13:45, 46 KRV)

레위기와 희년(18/3/13)

레위기와 희년

레위기는 27장까지 있다. 엄청 많은 규례와 법도를 설명한다. 그런데 7년 안식년의 7곱번째 즉 49년째 안식년외에 50번째 안식년에 대해서 설명한다. 저 개인적으로 이 것에 참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서인 레위기에서 그것도 끝부분에서 나오는 이 희년... 이 희년에는 여러가지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한가지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나의 속한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전체를 통해서 하고 싶은말인것같습니다. 이말을 이렇게 어럽게 할수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 하나님의 품군 그들은 자유자입니다. 나는 세상에 속했다면 자유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나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희년(자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품군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레위기가 말하는 것같습니다.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그가 이같이 속하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 그와 그 자녀가 자유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25:10, 54, 55 KRV)

나실인서원(19/3/13)


나실인서원

레위인이 아닌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이 나실인 서원이다. 이것은 평생하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기간만큼한다. 이때 삼손 이야기처럼 머리를 자르지 아니한다. 삼손은 단 지파사람이다. 재미있는것은 삼손은 인생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란 점이다. 지금은 나실인이 없지만 간혹 주변에보면 서원한다고 기간을 낭해서 기도방에 드러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실인이 어떤 의미일까? 내가 인생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나실인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전체를 하나님 것이라 구속한 사람들일까?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민수기 6:2, 13 KRV)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사사기 13:7 KRV)

은혜받은 사람은 고난받는다(19/3/13)

은혜받은 사람은 고난받는다

드디어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12명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본것을 이야기합니다. 10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슬퍼하며 애굽으로 돌아갈것을 결정합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갈렙(나머지2명)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그땅은 축복의 땅이고 우리가 차지할수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들은 정말 얄밉게 보였나봅니다. 돌로쳐서 죽일려고 했으닌깐요. 비슷한 장면이 교회에도 많이 있는것같아요. 은혜받아서 조금 들뜬것같으면 주변에서 격려 한마디씩 합니다 "나도 그럴때 있었다" "얼마나 오래가나 함보자" 이렇게 말로 실족 시킵니다. 우리는 10명의 정탐군이되어서 지체들의 믿음을 떨어트리는 모습으로 살고있진 않는지 돌아봐야합니다. 그 말 한마디가 그들의 영혼을 죽인다는 사실은 분명 알고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여행에 동반자가 될것인지 아니면 옆에서 믿음의 시련을 주는 시험자로 있을것인지 한번 생각해볼일입니다. 나의 믿음의 말이 여러 영혼을 살릴수있습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민수기 14:6, 7, 10 KRV)

믿음과 신념(19/3/13)

믿음과 신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광야를 허락하셨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광야에서 죽기 싫었나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땅으로 올라갑니다. 이게 믿음일까요? 모세가 가지 말라고 하지만 올라갑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믿음인지? 믿음이 좋아서 올라가는 것인지? 모를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념은 나는 할수있다입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걸까요? 신앙이 좋은건지 나에대한 믿음이 좋은건지는 하나님만이 알겠죠? ㅋㅋ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아말렉인과 산지에 거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쳐서 파하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민수기 14:42, 43, 45 KRV)

꽃이 피어난 아론의 지팡이(19/3/13)

꽃이 피어난 아론의 지팡이

백성(고라자손들)들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너희들만 크지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라자손들을 멸하십니다. 아무도 모세와 아론의 리더쉽에 이의를 제기 못하도록 지파의 지팡이를 가져오게하고 그리고 지팡이에 살구 꽃이 피어납니다. 나중에 언약궤안에 보관된 이 아론의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한 증거입니다. 아론의 지팡이에 살구 꽃이 피어났어요. 근데 그 당시 그지방에는 살구꽃이 아니고 "아몬드"라고 합니다. 한국어에는 아몬드가 없어서 살구 꽃이라고 했답니다. 우리는 리더쉽에 의문을 제기 할수있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아닌것같습니다. 리더쉽은 쟁취하는것이 아니라 섬김에서 나옵니다. 교회가면 대부분 리더쉽을 가지신분들이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손님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접대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나요? 아니면 손님이라서 움직이지 않고 섬김을 받나요? 리더쉽은 섬김에서 나옵니다. 섬김에서 나오는 진정한 리더쉽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 중에서 각 종족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 취하되 곧 그들의 종족대로 그 모든 족장에게서 지팡이 열 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민수기 17:2, 5, 8 KRV)

요단을 건너지않게 은혜를 베푸소서(20/3/13)

요단을 건너지않게 은혜를 베푸소서

르우벤과 갓지파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요단강 건너지 않고 성읍을 쌓을수있는 은혜를 달라고... 이유는 재산이 너무 많아서... 모세는 하락을 합니다. 이들의 결정으로 나중 이방의 침략을 받을때 먼저 무너지게됩니다. 은혜는 구했으나 이것이 후손들에게 큰 근심이되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는 은혜를 우리는 구하고 있지 않나요? 광야 40년을 통해 그들이 달려온 요단강 건너편이 이제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린것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하다보면 내가 구하는 은혜가 어쩌면 광야에 머무는 삶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은혜를 구하나요?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민수기 32:1, 5 KRV)

모세와 요단 저편(21/3/13)

모세와 요단 저편

모세는 요단저편을 갈수없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건너가기를... 모세가 건너갈수없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없이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 시작하실수 있었지만 모세는 그럴수 없다고 기도합니다. 그럴려면 생명책에서 없애달라고... 아마도 하나님은 이때 모세에게 진노하고 이스라엘백성을 용서한것같습니다. 모세는 진노받아서 가나안땅을 가지못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땅에 가지 못할것을 알았을까요? 그는 기도합니다. 들어가게 하소서... 그때 하나님은 그를 위로하며 "족하다"라고 합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모세는 요단건너를 가지 못했지만 요단 건너편을 눈으로 보는 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모세는 진정한 리더같습니다. 자신의 즐거움 을 백성을 위해서 내어놓았던 사람이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죽어도 못하겠죠? 왜? 하나님은 모세를 이름으로 안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의 기도... 너무 멀리있네요 ㅋㅋ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명기 3:23, 25, 26 KRV)

택하신 이유? (21/3/13)

택하신 이유?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여 머리로 택한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가장 적은민족을 택하였다. 내가 만약 사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ㅋㅋ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부족한 사람일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부요함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누리는 하루이기를 기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KRV)

성경말씀은 언제 읽을것인가?(21/3/13)

성경말씀은 언제 읽을것인가?

어떤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은 성경 읽는것이 힘들다고 했다. 맞는말이다. 정말 힘이든다. 성경을 읽는 시간을 하루에 가장 소중한 시간에 할당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바른 자세로 읽을려고 하기 때문일것같다.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성경은 언제 읽어야하나? 아무때나 시간 나는대로 읽는다. 그곳이 어디든 상관이 없다. 군대에 있을때 내가 성경을 제일 많이 읽은곳은 화장실이다. 밤에 유일하게 불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그때 그 버릇때문인지 화장실에 갈때는 성경책을 들고 간다. ㅋㅋ 혹 어떤분께선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느낄수있다. 화장실은 거룩한곳이 아닌가? ㅎㅎ 내 친구중엔 목욕하면서 탕에 들어갈때 비닐로 성경을 싸고 읽기를 좋아한다. ㅋㅋ 하나님이 화를 내실까? 과연 우리의 어떤 모 습이 하나님이 원하는 걸까? 아래의 말씀중 웃긴것은 미간에 붙여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까지 한번도 미간에 붙인 사람을 본적이 없다. 아... 이 얼마나 불순종한 모습인가? ㅋㅋ 저는 성경을 시간이 날때마다 읽습니다. 왜냐하면 바빠서가 아니라 시간이 날때마다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ㅋㅋ 그러나 많이 읽지는 못하네요.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신명기 11:18-20 KRV)

face to face (대면)(21/3/13)

face to face (대면)

하나님을 우리는 얼마나알까? 잘 모른다. ㅋㅋ 모세는 얼마큼 하나님을 알았을까? 많이? ㅋㅋ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face to face 대면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을 얼마큼 알았냐면 대면하여 알던자라고 말했다. 이게 어느정도일까? 바울이 이런 말을 한다... 그날에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언제? face to face 얼굴을 마주할때..
그러니 모세가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참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나는 하나님을 얼마큼 아는가? face to face 만큼 알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ㅋㅋ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신명기 34:10 KRV)

There has never been a prophet in Israel like Moses; the Lord spoke with him face to face. (Deuteronomy 34:10 GNB)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KRV)

신을 벗다(21/3/13)

신을 벗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서 이제 본격적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한 사람을 만납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입니다. 이 사람이 군대를 끌고 온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전하러왔습니다. "너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 이 말을 전했습니다. 모세도 처음 하나님을 만날때 이말을 들었습니다.
신을 벗는다? 전에는 이말을 자신의 신분과 경험을 이야기하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즉 나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선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하는 것일 까요? 구약성경 역사서 후반을 보면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맨발"... 그들은 노예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불렀을때 나의 생각 경 험을 내려놓아란 의미도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는 의미는 노예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노예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포로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네요.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언제나 하나님ㅇ 사랑에 붙잡힌 "맨발"의 모습으로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 5:13-15 KRV)

묻지 아니한죄(21/3/13)

묻지 아니한죄

신앙생활의 대부분이 차지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시간이고 그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시간입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쉬는 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모세와 여호수아가 지은죄입니다. "묻지를 아니하고" 모세는 12명의 정탐군을 보낼때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였고 이결과로 40년광야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본문에서 기브온거민과 화평을 합니다. 정확히 성경엔 "묻지 아니하고"라고 나와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최대 실수라고 말할수있는 부분입니다. 지금우리에게 적용하면 기도를 쉬는 죄입니다. ㅋㅋ 이게 큰죄입니다. 날마다 제가 범하는죄같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여호수아 9:9, 14, 15 KRV)

전무후무한 응답(21/3/13)

전무후무한 응답

세상이 응답안되는 기도가 몇가지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이 기도이다. 태양과 달을 멈추는 기도이다. 이 기도의 응답은 앞으로 더 이상 없을것다. 그렇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기브온 거민을 구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새벽에 공격을해서 저녁까지 전쟁을 한다. 이때 하늘의 태양을 멈추는 기도를 드린다. 밤은 이스라엘 백성에겐 힘든 싸움이였을것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단서가 있다. 다음엔 응답 안해준다입니다. 우리도 단지 기도의 범위를 제한하는것같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기도...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시므로 여호수아가 그들을 기브온에서 크게 도륙하고 벧호론에 올라가는 비탈에서 추격하여 아세가와 막게다까지 이르니라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여호수아 10:10, 13, 14 KRV)

이스라엘의 장자지파는 누구인가?(22/3/13)

이스라엘의 장자지파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장자지파가 누구일까요?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같아요. 에브라임 지파를 기억하나요? 요셉의 둘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요셉 대신 그의 두아들을 자녀로 삼고 에브라임에게 장자의 축복을 줍니다. 르우벤은 장자이나 장자권이 요셉지파에게 주어집니다. 여기서 어려운 부분이 저에겐 바로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이스라엘 전통은 장자에게 두배의 유산을 물려줍니다. 과연 에브라임은 두배의 땅을 받았을까요? 성경을 보면 므낫세 지파는 2개의 땅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하나만 차지하죠. 왜? 이럴까? ㅋㅋ 혼자 고민했봤어요. 장자의 축복을 받은 에브라힘... 사람의 수는 많았던것같지만 므낫세지파보단 땅을 차지 못한 지파... 분명 이들은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땅을 더 달라고... 여호수아는 가서 차지하라고합니다. 므낫세지파는 열심히 차지했던것같습니다. ㅋㅋ 장자의 축복을 받고도 땅을 많이 못차지한것인 그들이 장자권을 사용했지만 장자권의 의미를 에브라임지파는 그저 복을 두배나 받는것으로 착각했던 것일까요? 땅을 많이 차지한 사람(갈렙)도 보면 분명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여호수아는 가서 점령하라고합니다. 아마도 에브라임은 권리를 주장했지만 그 권리를 이행하기위한 전쟁을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요셉지파 전체에 주신 장자권을 그들이 누린것은 사실입니다. 장자권은 사용해서 그들은 다른 이스라엘 지파보다 많은 땅을 얻게되었으니까요. 장자권의 권리는 의무인 전쟁이 함께 따라온다고 묵상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나네요 ㅎㅎ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세기 48:14 KRV)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서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 (여호수아 19:51 KRV)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역대상 5:2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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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의 제단(22/3/13)

증거의 제단

므낫세 반지파(땅을 두개 차지해서 떨어져 살기에 반쪽)가 제단을 쌓아요. 이것은 본 다른 지파는 성을 냅니다. 악을 행치말라고..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제단을 쌓아도 이건 증거로 만든거지 제사를 위한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 우리와 하나님이 관계 없다라고 할까봐서... 그 제단의 이름이 "증거" witness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의 증거 제단을 쌓아가야하지 않을까요? 혹시 내가 낙망하고 상처입고 있을때 그 증거의 제단은 우리를 일으켜줄거라 믿습니다. 삶이 증거인 예배의 삶.. .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되시는 증거의 제단..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신앙생활이라고 묵상했습니다.

The people of Reuben and Gad said, “This altar is a witness to all of us that the Lord is God.” And so they named it “Witness”. (Joshua 22:34 GNB)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여호수아 22:34 KRV)

사시기의 시작(22/3/13)

사시기의 시작

사사기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요? 이방인들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마도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없었기 때문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모르는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전해야할것은 아마도 "여호와의 하나님되심"이 아닐까요?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2:7, 10 KRV)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계획(22/3/13)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계획

사사기는 7곱번의 반복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사기의 시작에는 이스라엘백성이 이방인을 다 물리치지 못했는데 이건은 분명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멈추진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방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계획속으로 이끌어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다만 그 길이 힘이듭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치고 상처나도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왜? 나는 멈추어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관점을 바꿀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사사기 1:19 KRV)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사사기 3:4 KRV)

큰 사사와 작은 사사 (22/3/13)

큰 사사와 작은 사사

사사기는 유명한 사사와 무명의 사사 이야기로 꾸며져있는것같습니다. 삼갈은 딱 한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우리는 유명한 그리스도인만 기억하지만 우리가 알지못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교회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유명한 자들보다는 무명한 자들이 더 필요한것같습니다. 나의 이름을 들어내는 것이 아닌 무명하나 유명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세대같습니다. 나는 유명한 자입니까? 무명한 자입니까?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사사기 3:31 KRV)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6:9 KRV)

나를 보는 관점: 하나님의 시각 vs 나의 시각 (22/3/13)

나를 보는 관점: 하나님의 시각 vs 나의 시각

오늘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릅니다. 그에게 "큰 용사"라고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극히 약하고 작은자"라고 답합니다. 무엇이 맞는 걸까요? 우리는 현재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우리의 눈에는 지극히 작은자가 맞을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질 것같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새로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것같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고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사사기 6:12, 15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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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기준은 어디에? (23/3/13)

축복의 기준은 어디에?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을 축복하는 자리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났을땐 주변의 협력자들이 이제는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있는것을 봅니다. 암몬 족속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들은 룻의 자손이기에 아브라함 형제집인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도우는 자들이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낼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통해흐르지만, 하나님을 떠날때 는 모든 환경을 통해 우리를 대적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인가요?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신명기 2:19 KRV)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사사기 10:7 KRV)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사사기 11:27 KRV)

이스라엘의 장자지파의 운명(22/3/13)

이스라엘의 장자지파의 운명

사사기에 보면 정말 이상한 지파가 나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장자지파인 에브라임지파입니다. 요셉의 둘째 아들이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사기에선 그들은 사사들을 대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는것같습니다. 기드온과 대적하고 다투고 그리고 입다와 다툽니다. 입다는 기드온처럼 온순한 사람이 아니였나봅니다. 그는 에브라임을 치기를 결정합니다. 에브라임은 장자지파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전쟁있을땐 숨고 농공행상을 따질때는 목소리를 높이는 지파가되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한 모습인가요? 혹시 우리중에 에브라임과같음 모습이 있을수 있습니다. 원래 장자지파의 모습은 지체를 세워주고 기도하고 섬기는 모습이 장자지파의 모습일것같습니다.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창세기 48:20 KRV)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사사기 8:1 KRV)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사사기 12:1, 4 KRV)

언약궤의 능력 (23/3/13)

언약궤의 능력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상징이 언약궤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군대에 패합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할까요? 빼았긴 언약궤... 언약궤를 빼았긴 이스라엘 백성... 신기하게도 이제부터 새무엘 시대가 열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중 많은 갈등이 이와같은것같습니다. 보여지는 많은 헌신과 봉사의 모습들이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실거라 믿고 있지만 넘어지고 실족하여 힘들어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들 들었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보여지는 믿음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것을 멀리하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봅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합니다. 전쟁에 나가지않고 전쟁을 이깁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사람... 우리는 다시한번 하나님 음성듣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돌아봅니다.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사무엘상 4:4, 10, 11 KRV)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사무엘상 7:3, 6, 10 KRV)

사무엘과 사울(23/3/13)

사무엘과 사울

사무엘과 사울은 둘다 지도자입니다. 그들이 다스리는 동안 무엇이 달랐을까요? 사무엘 시대에는 블레셋과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왔고 사울의 시대는 블레셋과 큰전쟁이 있습니다. 사울을 보면 그는 전쟁때문에 사람들을 주변에 모았습니다. 전쟁을 대비한 사울은 현명한 사람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조금 다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했던 사무엘, 사람을 먼저 의지했던 사울... 우리는 그입장이 되어보지 못했기에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다고 말하기 힘들것같습니다 ㅋㅋ 우리 주변엔 나를 통해 평화가 찾아오나요? 아니면 분쟁이 잃어나나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가 필요한 이 시대같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사무엘상 7:13, 14 KRV)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사무엘상 14:52 KRV)

다윗과 요나단 (23/3/13)

다윗과 요나단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일것을 알고 다윗을 도망하게합니다. 헤어질때 다윗이 얼마나 요나단을 그리워할지를 표현한 부분이 나옵니다. "더욱 심하더라" 통곡함이 더욱 심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할때 이와같이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이들이 언약을 합니다. 너와 나사이 그리고 너의 후손과 나의 후손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나됨은 서로 노력함으로 가능할수 있지만 진정한 하나됨은 하나님을 통해 연결되는 것같습니다. 지체간의 교제사이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될수 있을것같습니다. 나와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ㅎㅎ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사무엘상 20:41, 42 KRV)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 (23/3/13)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

사울이 몇번의 공격을 다윗은 도망이라는 방법으로 피합니다.
다윗이 힘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선택했 자를 대적할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다윗은 믿었습니다. 그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나아간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지체들은 하나님이 택하고 구원한 사람들이라고... 이들과 분쟁이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아마도 다투지 않는 것이 맞는것같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이루실것을 믿기 때문이겠죠?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사무엘상 24:6, 7 KRV)

하나님앞에서 어린아이같이 (24/3/13)

하나님앞에서 어린아이같이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달라지는 점이있습니다. 처음 교회를 다니면서 "적당한" 신앙생활 어떤것 인지 모릅니다. 헌금은 얼마를 해야할까? 예배생활은? 찬양은 큰소리로? 기도는? 봉사는? 이런것을 교육받고 거기에 따라갑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이라고 믿고 갑니다. 따라서 이 받은 교육보다 못하면 정죄감이 오고 받은 교육만큼하면 스스로 나는 "착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제가 느낀점은..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내공이 늘어가는데 어떤 내공이냐면? 들키지 않는 내공이 늘어납니다. 자신의 신앙을 들키지 않는 내공 말입니다. ^^ 이게 참 웃긴것같아요. 교회에와서 신앙을 들키지 않기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의 모습 이라니... 말씀의 교제는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암묵적 동의하에 서로 아픈곳을 건들지 아니합니다. ㅋㅋ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처, 다말이 하나님앞에서 춤추는 다윗을 조롱합니다. 믿음생활 잘할수록 근엄해야지.. 방방뛰다니..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앞에서 뛰어놀리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요? 다윗이 누린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야하지 않을까? 사람들 앞에서의 믿음생활이 아닌 하나님앞에서 믿음생활이 필요한것같습니다. 쉽지 않는 일입니다 ㅋㅋ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사무엘하 6:16, 21 KRV)

죽은 자같은 나에게 (24/3/13)

죽은 자같은 나에게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숨어지 지내고있는 그에게 다윗은 불러서 그를 자신의 상에서 밥을 먹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언약을 기억하여 우리를 불러주실때.. 우리는 뭐라고 해야할까요? 므비보셋은 "죽은 개같은 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죽을 뻔했던 자가 아닌 이미 죽은 자라고 고백하는 믿음... 절대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살수 없는자라고 고백해야하지 않을까요?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사무엘하 9:6-8 KRV)

하나님께서 하셨다 (24/3/13)

하나님께서 하셨다

믿음의 여행에서 우리가 부딛히는 고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 있을때 고백하는 것이 더 힘든것같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갈때 시므이(베냐민지파)는 저주합니다. "피흘린자여" 다윗은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에 저주까지 받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때 다윗이 택한 방법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며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나의 믿음은 상황이 좋을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힘든 상황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할수 있는 믿음이 있길 소원합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사무엘하 16:7, 10 KRV)

시바와 므비보셋 (24/3/13)

시바와 므비보셋

위기를 만난 므비보셋은 다윗앞에서 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위기를 만날수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렵습니다 ㅋㅋ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사무엘하 16:3, 4 KRV)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사무엘하 19:25-27, 29 KRV)

긍휼 (24/3/13)

긍휼

우리는 누울곳을 보고 눕는다. 이건 상식이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다? 이게 죄일까? 참 어렵다. 성경은 이것을 범죄라고 말한다. 인구조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윗은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것같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고 싶었던것이 아닐까? 그는 인구조사후 그가 범죄한것에 대하여 자백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다. 그가 구한 긍휼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싶고 사람의 손에서 벌받길 원치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다윗이 구한 긍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아무런일도 아닌 인구조사같지만 다윗은 스스로 범죄한 자신을 보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모습이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만약 스스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할것같다. 나는 언제쯤 이렇게 범죄에 대하여 민감할수있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맡겨지길원하는 기도를 할수있을까?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사무엘하 24:10, 14 KRV)

작은아이 (25/3/13)

작은 아이

나갈때와 들어올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아이 같은 사람이다. 라고 자신을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지혜의 왕 솔로몬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지혜가 필요하다고 기도합니다. 이유는 백성이 많은데 다스릴 지혜가 필요하다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백성을 유익을 위해 자신의 소원을 구했던 왕이였습니다. 나중에 변하지만 ^^ 그래도 처음 마음은 그랬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건 우리의 눈높이에서 그렇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 높이에서 나를 보면 얼마나 아이같은 자 처럼보일까요? 나를 보고 나를 판단할때 기준이 내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맞는 것같습니다.
아이같은자이나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무것도 없으나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열왕기상 3:7-10 KRV)

공의: 반을 나누라 (25/3/13)

공의: 반을 나누라

하나님의 긍휼과 공의는 동시이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솔로몬의 판결에서 솔로몬은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고 판결을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상의 법 같습니다. 이 판결을 들은 어미는 그만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청합니다. 내가 포기하겠습니다. 왜?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문제에 고민을 합니다. 반으로 나눌것인가? 살릴것인가? 교회는 살리는 곳입니다. 공의가 아무리 옳다고해도 사람을 죽인다면 우리는 한번 생각해봐야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공의롭습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심을 구약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대가가 따릅니다. 이것을 말한 이유는 우리 스스로 이 올무를 벗어날수 없다는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스스로가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공의 로운가요? 반으로 나눌까요? 살릴까요? 오늘 이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결코 공의로운 판단(아이를 포기함)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어머니의 마음(생명을 살리고 싶음)에는 충분합니다. 아들을 살릴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공의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애통한 마음의 소유자입니까? 어려운 문제입니다 ㅎㅎ 하나님의 공의는 여기에 숨겨져있습니다. 어머니는 거짓을 왕앞에 고했으니 이제 죽어야합다. 아들을 살리기의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공의입니다.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열왕기상 3:26, 27 KRV)

나의 신앙은 어디에? (25/3/13)

나의 신앙은 어디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평가받길 좋아하고 평가하길 좋아합니다. 그중에 평가 기준이 참 다양하지만 얼마큼 축복받았는지 얼마나 좋은 교회를 다니는지 어떤 직분을 가졌는지 등등 다양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고수를 만나면 이런것들이 아무 소용없어집니다. ㅋㅋ 그런데 그런분들은 웃으며 모른척해줍니다. 알아도 모른척... 전에 일본에 잠시 있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동경교회"에 다녔는데... 저의 동아리 선배님(부목사님)께서 절대로 어디서 훈련받았다고 까불고 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몇 스펙 자랑하시는분들 교회오셔서 시험아닌 시험을 주고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동경교회는 참 대단한교회입니다. 혹시 시간있으시면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듯합니다. 훈련과 전도가 생활화되어있는교회... 스펙 자랑하시는 분들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힘듭니다. 저는 그곳 6개월간 처음단계부터 훈련을 받아갔습니다. 떠날때가 되었을때 저의 선배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잘했다" 이말 한마디가 참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 내가 어떤 직분맡았는지 나의 훈련이 얼마나 되었는지 사실 중요하지만 이것이 나의 믿음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요한동경교회에서 배운것입니다. 직분이나 훈련이 결코 전도와 비레하지 않거든요. ㅋㅋ 지금도 일본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동경교회 여러분 그리워요.

예배는 어디서? (25/3/13)

예배는 어디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유대인들의 정통성이 미웠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해야하나요? 예수님은 유대인이였기에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할줄 알았겠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다른 답을 합니다. 하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자를 찾으신다고....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찾아오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은 많은 한이 담겨져있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된 질문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이 남 유다와 분열후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제단을 벧엘에 쌓았습니다. 이때부터 예배장소 때문에 사람들은 다투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싸움을 잘 합니다. 어떻게 예배 드리는 것이 잘 드리는 것인지? 순서가 어떻게?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예배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본질을 놓친 종교행위... 우리는 무엇을 놓치며 살고있을까요?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열왕기상 12:26-29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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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은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일어나는가?(25/3/13)

이적은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간 가뭄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방지역에 살고 있는 과부집에 가서 그 가족을 구합니다. 신기합니다. 분명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는데 오직 이방지역에 살고 있는 과부를 구원하기위해 엘리야를 보내시는 하나님? 이해하기 정말 힘이듭니다. 성경을 그냥 읽어보면 기사와 이적이 상당히 많이 나온듯 하지만 꼼꼼히 찾아보면 한사람의 인생에서 특히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겐 몇십년에 한번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기적을 너무 자주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ㅋㅋ 그럼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요? 저의 생각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삶은 하나님의 비전과 전혀 상관없는 듯한 삶을 살면서 내가 원하는 기적은 날마다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럼 기적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하나님의 비전을 내것으로 품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비전을 바라보며 달려나갈때 우리는 아마 기적을 체험하는 세대가 될수도 있을것같습니다 ㅎㅎ 문제는 하나님의 비전이 뭔지?? 아시는 분은 댓글을 ㅋㅋ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열왕기상 17:9, 14 KRV)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누가복음 4:25, 26 KRV)

신앙생활은 세미한 음성을 듣는것이다. (26/3/13)

신앙생활은 세미한 음성을 듣는것이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음을 구합니다. 살기위해 도망치는 자신이 한심해서 일까요? 아님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가 한명도 없어서 외롭기 때문일까요? 하여간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음을 청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렸을까요? 엘리야는 아마도 갈멜산에서 승리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종종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내가원하는 일들이 생길거라고... 하지만 결과는 달랐고 엘리야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원치 아니한 결과임에 분명합니다. 스스로 말하시를 자기는 앞에 있건 선지자보다 못한자라고 고백합니다. 이말은 비꼬아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화가 많이 났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신세한탄에 하나님이 얇밉게 보였을수도 있습니다. 사실 엘리야만큼 기적을 많이 행한 선지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알던 선지자였습니다. 스스로 말하길 나는 하나님께 열심이 특심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잘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리나 오늘 하나님께선 그에게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앞에 서 있으라... 그리고 하나님은 한가지 교훈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보여지는 것들에 있지않고 잔잔한 음성가운데 있다는것을... 엘리야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합니다 "네가 어찌 여기있느냐?"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잠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열심이였고 이적을 많이 행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곳에 머물머 실족할수있다는 것을... 엘리야는 이때 자신의 신앙관을 다시 점검했을것같습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사)을 듣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것같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소망(엘리사)을 주십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은 이벤트나 행사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기도) 중심의 신앙생활이 중요함을 알려주는 것같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봅니다. "네가 어찌 여기있느냐?" 아마도 많은 선교사님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하나님의 말씀이였을 겁니다. 우리는 뭐라고 대답해야할까요?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KRV)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11-13 KRV)

엘리사 (26/3/13)

엘리사

이 사람은 앨리야의 수제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엘리야가 떠나기전이 무엇을 원하냐고 했을때 영감을 두배 달라고 구했던 사람입니다. 엘리사에 관한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군대 장관이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은혜를 입은 아람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다시 공격합니다. 이 때 다시 나아만이 나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ㅋㅋ 아람은 성을 둘러싸고 버티기 작전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항복하길 기다립니다. 엘리사가 왕에게 나아가 걱정말고 내일 아침이면 모든것이 다 해결된다고 말을 전하지만 이스라엘 군대장관은 결코 믿을수없다고 화를 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날밤... 문둥병자 세명이 아람 군대 병영으로 먹을것을 얻으러 갑 니다. 그들의 발자국소리가 아람군대에게 수십만의 기병대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아람군대는 바로 도망을 칩니다. 다음날 아침... 문둥병자들이 보고를 합니다. 먹을것이 많으니 나오세요.. 라구요. 이날은 축복의 날인데 오직 한 사람에겐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군대장관입니다. 그는 성문을 지키다가 사람들에게 밟혀죽습니다. 은혜의날에 죽은 불쌓한 사람이지요. 오늘 등장 인물중 중요한 인물은 문둥병자하고 이스라엘 군대장관입니다. 문둥병자가 좋은 소식을 백성에게 전하지 않았다면... 좋은 소식을 모른체 많은 사람들은 굶어죽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장관은 성문을 지키며 나름 해결책을 찾았던 사람이였습니다. 이 사람이 엘리사에게 화를 낸 이유가 궁금하죠? 이스라엘 왕이 그보다 엘리사를 의지 할까봐서 ㅋㅋ 그는 하나님의 기적을 들었으나 참여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떨까요? 좋은 소식을 전할까요? 그냥 곡식을 땅에 묻어두고 돌아갈까요? 자신의 경험과 지위를 의지할까요? 하나님께서 개입할수있는 가능성을 열어둘까요? 아님 내가 원하는 방식을 고수할까여? 이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날마다 좋은 소식을 던하거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사람이면 좋지만 현실은 쉽지않아요 ㅎㅎ

저희가 그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고하매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열왕기하 7:15, 17 KRV)

산헤립 vs 이사야 (26/3/13)


산헤립 vs 이사야

앗수르 왕 산헤립은 유다왕 히스기아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 너희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할수 없다고... 떨고 있는 히스기야왕에게 이사야는 말합니다. 놀라지말고 결코 그들이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날밤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앗수르 군사 십팔만명이 죽습니다. 산헤립왕도 돌아가다가 죽습니다. 많은 나라를 물리쳤던 왕... 아무도 그를 대적할수 없을것같았던 앗수르왕이였지만 하나님앞에 무릎꿇은 백성의 기도때문에 전쟁에서 패하고맙니다. 절대로 내가 해결할수 없는 일을 만났을때는 아마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날때 일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은 기도였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것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티는것같습니다.

산헤립왈: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열왕기하 18:35 KRV)

이사야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열왕기하 19:32, 33 KRV)

결과: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열왕기하 19:35 KRV)

빈천한자(26/3/13)

빈천한 자

유다는 두번의 바벨론의 공격으로 망합니다. 이때 남겨진 사람들이 "빈천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유다는 결국 망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전부 노예로 끌려가고 오직 빈천한 사람들만 남게됩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이런 상황에 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관심은 멀어지고 다른 것으로 채우고 있는것같습니다. 우리가 귀하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채우고 있는 것들이 실은 하나님의 눈에는 "비천한것"들 일수도....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를 채우고 있나요?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열왕기하 24:14 KRV)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열왕기하 25:12 KRV)

호세아서 묵상 (무조건적 선택) (17/5/13)

호세아서 묵상(무조건적 선택)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호2:23)"

1.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호세아서는 칼빈의 5대강령중 무조건적인 선택을 잘 설명하는 부분이 호세아서 기록되어 있습니다.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서을 택할때 그들이 선하거나 하나님을 알아서 섬겼던 사람을 택한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보는것이 맞을것같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것을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아브라함이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된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도 이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1:10)"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3.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곳에서 그들을 불렀지만 결국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 숭배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백성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호세아서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고 "입술의 열매"을 원하시는것같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고치고 그들을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알길이 없는것 같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14:2)"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11:9)"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4-5)"

*생각해보기:
1.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볼수 있는것이 무엇이 있을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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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묵상 조서의 관점(17/5/13)

다니엘서 묵상 (또 다른 조서 이야기 )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 하니(다니엘6:15)"

1. 첫번째 조서: 다니엘서에도 조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번에 에스더에서도 나왔는데 여기에도 나옵니다. 다니엘이 바사의 다리오왕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였지만 이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다니엘을 흠잡기 위해서 계략을 꾸밉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를 만들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 빠트리는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왕을 꼬셔서 "왕의 도장을 찍어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만들어서 다니엘을 죽일려고 합니다. 왕은 허락을 하고 다니엘은 결국 사자굴에 들어가게 됩니다. 왕은 어떻게 해볼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아파합니다.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다니엘6:8-9)"

2. 두번째 조서: 새벽일찍 왕은 사자굴에서 살아있는 다니엘을 건져내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사람들을 사자굴에 빠트립니다. 그리고 다시 조서를 한개 만듭니다. 이 조서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이 법령은 또한 왕의 조서이기에 변계할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이 조서에 기록된 내용이 어떤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한가지 힌트를 알수 있는것은 바로 에스라서에 나옵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다니엘6:26)"

3. 조서의 내용: 다니엘은 메데와 바사의 다리오시대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내용을 보면 바벨론 70년의 포로이후로 유대 사람들이 돌아갑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29:10)" 이 때쯤이 바로 다니엘이 바사의 관리로 있을때이고 두번째 다리오왕의 조서는 아마도 에스라서에 포로귀환 때의 조서일 가능성이 있을거라 생각듭니다. 에스라 6장에 나오는 다리오왕이 내린 조서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고 그들에게 경비를 주고 제사를 행하게 하고 조서의 내용을 변개하는 자는 벌하고 그리고 이 조서의 내용을 신속히 행하라는 것이 조서의 내용입니다. 이 조서의 중심에는 다니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다니엘에게서 누구를 발견할수 있습니까?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에스라6:8-13)"

4. 저는 성경을 조서(법)로 보는것을 재미있어합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사망의 법(첫번째 조서)"과 "생명의 법(두번째 조서)"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법"으로 옮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다니엘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형을 찾을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생각해보기:
1. 구약을 보면 참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발견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구약에서 오실 예수님의 모형은 어떤것이 있나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

전도와 양육에 관한 생각( 17/5/13)

전도와 양육에 관한 생각

저의 초보적인 전도의 경험을 페북에 올려보니 많은 분들께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름 정리를 해보고 저의 생각도 이야기 해볼려고 생각입니다.

1. 전도는 왜/어떻게 하는것인가? (댓글에 나온 의견들)

1) 전도는 은사가 아니고 모든 믿는자들이 행하여야할 사명이다.
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야한다
3) 전도해서 가장 득보는 사람은 전도자이다
4) 말로서 전도를 하다보면 상처를 줄수도 있기에 흘러넘치는 향기인 삶을 통해서 전도를 하는것이 좋다
5) 문화가 다른나라 사람들과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 전도하는것이 좋다
6) 전도는 열심으로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것이다
7) 전도는 설래임과 떨림이다. 전도는 전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한다
9) 전도는 어떻게보다 언제인 하나님의 때가 더 중요하다
10) 전도는 사명감과 의지로 하는것이 아니다
11) 전도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애통한 마음으로 해야한다
12) 전도는 기도로 준비해야한다
13) 전도의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면 안된다
14) 전도는 사명이기에 하나님께서 전도의 마음을 주신다
15) 전도는 예비해주신 영혼을 만나는것이다
16) 전도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것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야한다
17) 전도의 상급은 전도 그 자체이다
18) 전도는 나의 삶의 이야기를 주변에 함께 나누는것이다

2. 노방전도와 관계전도
노방전도는 어쩌면 가장 단기간에 행할수 있는 전도같습니다. 단기선교가 특히 이부분에 속하는것같습니다. 우리가 준비할것은 전도지와 전할내용 그리고 기도로 준비하며 그 장소에 나가서 누구를 만날지 알지 못하지만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갑니다. 장점은 시간을 많이 필요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많은 대상자를 만날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것 같습니다. 단점은 지속적 만남으로 이어지는것이 쉽지 않다는것입니다. 예로 집이 없는 사람들을 전도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특별한 주거지가 없었기에 늘 항상 어디서 만날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지를 늘 항상 준비해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주무시고 계시기에 전해주고 싶은말을 적은것을 옆에다 놓아두고 오곤 했습니다. 양육으로 또는 교회로 연결하는것이 상당히 힘들없습니다.
관계전도는 몇 사람을 지속적인 관계속에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하기에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투자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벤트 형식으로 행할수 있는 전도가 아닌것같습니다. 장점은 전도후에 양육으로 넘어갈수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것 같습니다. 예로 학교상담 및 영어공부상담으로 만난 친구는 예수를 영접후에 매주 한 두번 커피나 식사를 같이하면서 신앙 상담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교회를 다니게되었고 지금은 혼자서 전도하러 다닙니다. 이런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3. 전도후의 양육
전도의 장기적 방향은 양육에 초점을 두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혼자서 전도를 하면 많이 할수 있는것같지만 함께 하는것보단 못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양육 대상자와 같이 전도를 하는것이 좋은것같습니다. 전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부족해도 옆에서 전도하는것을 도와주다보면 스스로 전도를 하게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핵심은 바로 제자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가 훈련을 받은 선교단체의 영향이 아마도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전도에 대한 지금의 관점을 가지게하였던것같습니다. 내가 할수 있는 양육은 기껏해봐야 같이 커피 마시고 밥사주고 신앙상담해주고 교회로 인도해주는일이 전부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못난 사람에게도 제자를 만나게 하시는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만나게 한다는것을 전도를 통해서 알아간것같습니다. 결국은 제자와 제자가 만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삶에서 체험하는것이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4. 결론
전도 -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엄청난 성령의 인도가 요구되어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다.
양육 -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해야한다. 그래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일대일 양육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해보기:
1.여러분이 생각하는 또는 경험한 양육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2013년 6월 6일 목요일

하나님과 화해 (16/5/13)

하나님과 화해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반의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같이 나누길 원하는 마음으로 적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화혜"는 어떤의미인가요? 그리고 "화혜자의 삶"은 어떤것일까요?  

1. 하나님과의 화해의 의미
하나님과의 화해를 설명할때 먼저는 우리가 화해해야하는 이유를 먼저 아는것도 중요한것같다. 성경에서 화해란 표현을 쓴것은 전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를 하였는데 그 교제가 끝어져기에 그 교제를 회복하는 의미에서 화해라고 말하는것 같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할수 있는 상태(하나님의 형상)로 창조되었던것같다. 그러나 죄가 사람들속에 들어오면서 하 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끝어진것같다. 이유는 하나님이 죄를 싫어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것은 죄의 결국은 사망이기 때문인데 이 때 사망이란 뜻은 아마도 하나님과의 분리와 단절의 의미하는것같다. 즉, 하나님과 화평한다는 뜻은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하는것 또는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되어진다. 

*관련성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5;14)

2. 하나님과 화해의 방법
하나님과 화해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같다. 그 방법은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그 새로운 언약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것같다. 따라서 나의 방법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져서 하나님을 만나는것이 가능해지고 그것이 하나님과 화해라고 생각되어진다.


*관련성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3.화해자의 삶
화해자의 삶이란 참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같다. 먼저는 내가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면 글 화해의 방법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날마다 새롭게 묵상되어지는것같다. 그리고 그 묵상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날마다 감사로 드러나는것같다. 내가 해결할수 없는 죄문제를 해결해주신것을 죽을때까지 잊지 않고 감사하며 묵상하는것이 먼저 화해자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따라서 우리의 죄문제 해결하는 방법, 즉 화해의 방법인 그리스도의십자가의 가치를 묵상하는것이 화해자의 삶같기도하다. 그래서 나의 내적인 감격이 외적으로 들어나는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인것 같다. 전도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는 일차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위한 인생전체의 여정으로 이해되어져야할것같다. 그리고 화해자의 삶은 각자가 다양한 모습으로 역할을 수행하지만 큰 하나의 목표인 화해를 이루어가는것에 어떤식으로든 협력되어지는것을 볼수있다. 이 전체의 그림을 이끌어가시고 각자의 다양한 모습(역할)을 사용하셔서 화해를 이끌어가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인것같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아야하는것같다. 마지막으로 이 여정은 혼자서 할때도 있지만 협력하여서 이루어가는것이 참으로 중요한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사명인 지상명령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가는것 같다.     

*관련성구: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4:5)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15: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돌(living stone 복음)이야기 (16/5/13)

돌(living stone 복음)이야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다니엘 2:34 KRV)"

1. 다니엘서에는 꿈이야기가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꿉니다. 이 꿈은 처음에는 다니엘과 다니엘 친구들에겐 위기로 다가옵니다. 꿈을 해몽할자가 없었기에 왕이 모든 박사를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 이 꿈에 나오는 "신상"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크고 두렵다고 합니다. 그 다음구절에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나라의 개념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즉, 사람이 세운 나라(우상)는 우리를 두렵게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하게 만드는 것같고 그러한 모든것이 바로 우상같습니다.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다니엘 2:32, 33 KRV)"

3. 하나님이 세운 나라(돌, 바람, 태산)
작은 돌하나가 두렵고 큰 우상(나라)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고 바람에 날려 흔적이 없어지고 큰 태산을 이루어서 온 세계에 가득해 집니다. 이 돌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아무리 두렵고 큰 우상의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질지라도 부숴뜨립니다. 그리고 바람은 아마도 성령님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성령님은 우상의 잔해를 깨끗하게 쓸어버리시는 것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성령님은 우리를 성화에서 영화로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30 KRV). 그리고 작은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충만하여 질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설것입니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다니엘 2:34, 35 KRV)"

*생각해보기:
1.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인것같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할까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복음 24:14 KRV)"       

하박국에 나오는 나의 구원자는 누구를 가르키는것일까? (15/5/13)

하박국에 나오는 나의 구원자는 누구를 가르키는것일까?


1.밑에 댓글을 달았다가 여기로 옮겨왔어요. 저의 얄팍한 지식이니 비판을 많이 해주세요. 그래서 성장이 있는것 같습니다.

2.하박국서는 2:4절이 중요한 구절같구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의인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은 황폐한 이스라엘이 지금 현실인데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회복시킬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니 내게 소망이 있다는 말씀으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전달하는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바울 선생님이 또 인용하였습니다. (롬1:17)... 


3.그리고 끝부분에 나오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 아 기뻐하리로다 (합3:18)"을 저는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영어로는 "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I will be joyful in God my Savior. " 이렇게 나오는데요. 성경에서 "나의 구원의 하나님"의 영어를 자세히 보면요. 'my Savior' 이렇게 나오죠? 만약에 이것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할때는 전부 대분자로 쓰는것 같아요. 그런데 첫 글짜만 대문자를 썼죠? 이 나의 주가 "예수님"을 지칭할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4. 그 예로 시편110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The LORD says to my Lor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your enemies a footstool for your feet." (시110:1)" 여기서 보면 LORD는 성부하나님 my Lord는 예수님을 가르킵니다. 첫글짜만 대문자죠? 신기하죠? 이말씀을 예수님께서 다윗이 구원의 주(메시야)를 가르켜 말하는 부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20:42)" 

5. 그럼과연 구약의 사람들중에 다윗말고 예수님을 인지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4)"

6. 구약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전도와 양육에 관한 생각 (15/5/13)


전도와 양육에 관한 생각


저의 초보적인 전도의 경험을 페북에 올려보니 많은 분들께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름 정리를 해보고 저의 생각도 이야기 해볼려고 생각입니다.



1. 전도는 왜/어떻게 하는것인가? (댓글에 나온 의견들)



1) 전도는 은사가 아니고 모든 믿는자들이 행하여야할 사명이다.
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야한다
3) 전도해서 가장 득보는 사람은 전도자이다
4) 말로서 전도를 하다보면 상처를 줄수도 있기에 흘러넘치는 향기인 삶을 통해서 전도를 하는것이 좋다
5) 문화가 다른나라 사람들과는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여 전도하는것이 좋다
6) 전도는 열심으로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것이다
7) 전도는 설래임과 떨림이다.
 전도는 전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한다
9) 전도는 어떻게보다 언제인 하나님의 때가 더 중요하다
10) 전도는 사명감과 의지로 하는것이 아니다
11) 전도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애통한 마음으로 해야한다
12) 전도는 기도로 준비해야한다
13) 전도의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면 안된다
14) 전도는 사명이기에 하나님께서 전도의 마음을 주신다
15) 전도는 예비해주신 영혼을 만나는것이다
16) 전도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것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야한다
17) 전도의 상급은 전도 그 자체이다
18) 전도는 나의 삶의 이야기를 주변에 함께 나누는것이다



2. 노방전도와 관계전도
노방전도는 어쩌면 가장 단기간에 행할수 있는 전도같습니다. 단기선교가 특히 이부분에 속하는것같습니다. 우리가 준비할것은 전도지와 전할내용 그리고 기도로 준비하며 그 장소에 나가서 누구를 만날지 알지 못하지만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갑니다. 장점은 시간을 많이 필요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많은 대상자를 만날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것 같습니다. 단점은 지속적 만남으로 이어지는것이 쉽지 않다는것입니다. 예로 집이 없는 사람들을 전도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특별한 주거지가 없었기에 늘 항상 어디서 만날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지를 늘 항상 준비해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주무시고 계시기에 전해주고 싶은말을 적은것을 옆에다 놓아두고 오곤 했습니다. 양육으로 또는 교회로 연결하는것이 상당히 힘들없습니다.
관계전도는 몇 사람을 지속적인 관계속에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하기에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투자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벤트 형식으로 행할수 있는 전도가 아닌것같습니다. 장점은 전도후에 양육으로 넘어갈수있는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것 같습니다. 예로 학교상담 및 영어공부상담으로 만난 친구는 예수를 영접후에 매주 한 두번 커피나 식사를 같이하면서 신앙 상담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교회를 다니게되었고 지금은 혼자서 전도하러 다닙니다. 이런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3. 전도후의 양육
전도의 장기적 방향은 양육에 초점을 두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혼자서 전도를 하면 많이 할수 있는것같지만 함께 하는것보단 못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양육 대상자와 같이 전도를 하는것이 좋은것같습니다. 전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부족해도 옆에서 전도하는것을 도와주다보면 스스로 전도를 하게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핵심은 바로 제자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가 훈련을 받은 선교단체의 영향이 아마도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전도에 대한 지금의 관점을 가지게하였던것같습니다. 내가 할수 있는 양육은 기껏해봐야 같이 커피 마시고 밥사주고 신앙상담해주고 교회로 인도해주는일이 전부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못난 사람에게도 제자를 만나게 하시는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만나게 한다는것을 전도를 통해서 알아간것같습니다. 결국은 제자와 제자가 만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삶에서 체험하는것이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4. 결론
전도 -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엄청난 성령의 인도가 요구되어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수 있다.
양육 -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해야한다. 그래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일대일 양육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해보기:
1.여러분이 생각하는 또는 경험한 양육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영원한 왕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에스겔 37장) (15/5/13)

영원한 왕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에스겔 37장)

1. 마른 뼈 -> 대언자 -> 생기 -> 큰군대

에스겔서 37장은 마른 뼈 환상으로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마도 이스라엘백성이 마른뼈같이 소망없는 존재들이였을것같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뼈에 관점에서 대부분 바라봅니다. 저는 "대언자"에 관점에서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언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른 뼈에게 전달하고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룹니다.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0)"

2. 남유다 막대기,북이스라엘 막대기 -> 대언자 -> 하나됨 

하나님은 막대기 비유에서 둘로 나눠진 이스라엘이 대언자 의 손에서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나누어진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는 방법은 위에서 말했던 마른뼈 환상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나눠졌던 이스라엘백성이 하나가되어간다고 말씀하는것같습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겔37:17)"

3. 영원한 왕이 다스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른뼈같고 나눠진 막대기 같은 이스라엘이 하나되고 그들을 돌이켜서 그 땅으로 돌아오게하시고 회복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회복은 이전에 회복하고 다른 회복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이 회복된 나라를 다스릴것인데 이 왕은 "영원한 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회복된 이스라엘은 영원한 나라가 됩니다. "영원한 왕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 이 나라를 하나님은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언자"로 부르신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겔37:25)"


 *생각해보기:
1. 하나님은 우리를 대언자로 부르신것같습니다. 무슨 말을 전해야 할까요?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