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대가는 죽음
로마서를 읽다보면 대부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로마서는 법과 법의 싸움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닙니다. 로마서에 정말 크게보면 3가지의 법이 나옵니다. 바울은 법이란 개념을 들고와서 "종/노예"란 말로 법의
구속력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속박된상태를 "노예"같은 상태라고 말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노예"가 되어 있을까요? 이것이
로마서에 흐르는 큰 줄기 같은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7:1)"
노예의 정의를 보면 "타인에게 얽매여 있거나 행동의 자유가 없으며, 자신의 인격과 행동이 전적으로 주인과 소유자에게 달려 있는 사람을 말
한다. 자유인의 반대이다" 라고 나옵니다. 만약 노예들이 주거지를 주인의 허락 없이는 떠나면 바울이 살았던 시대인 로마 식민지
시대에서는 대부분 공개처형 당할 시대였던것 같습니다. 이 노예의 개념을 로마서에서 많이 이용을 합니다. 즉 노예는 죽기전에는
절대로 자유를 할수 없습니다.
자 그럼, 로마서에서 총 세가지의 법이 나옵니다. 한번 고민해봐요. 조금 중요해서
먼저 이 법을 먼저 볼필요가 있어요 사실 가장 중요한 법이고 선행된 법이거든요. 그렇지만 잘 모르는 법입니다. 첫번째의 법은
"죄의 법" 입니다. 이 죄의 법은 사실 숨겨져 있어요. 잘 보이지 않구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내가 "죄의
법"아래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게 문제에요. 이것을 어떻게 발견하냐면... 죄의 법이 있는지 몰랐는데... 자신이 죄의
법 아래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고백합니다. 두번째법인 율법을 통하여 알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게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죄의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죄의 법"과 "율법"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6:6-7,18)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4)
두번째의 법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난다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숨은 기능>이 있는데
이것은 율법자체의 기능은 아니구요. 어떻게보면 당연한것인데... 사람이 죄인이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 없잖아요. 죽으닌깐요.
그런데 율법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법이면 당연히 사람들이 율법을 따르다보면 무엇이 보이냐면 <자신이 죄인인것이 밝히
드러나는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것으로 율법 자체는 선한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법이니 당연하겠죠. 그러나 율법을 거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자신속에
거하는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노예" 개념이 나오는데요. 바로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는데 행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법 아래 "노예"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죄의 법"이 자신을 속박하는것을 알게되는것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6-17)
이제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문제인것을 발견하고 자신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율법을 사모하지만 자신속에 "한 법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법이 바로 "죄의 법"입니다.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발견했으니... 바울의 고백이 어떨까요?
슬프지요... 맞아요 슬퍼요. 결국 말하기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바로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죄의 "노예"상태에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슬픈거에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죽기전에는 벗어날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3,25)
이제 세번째 법이 나옵니다.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 입니다.
간단하게 생명의 법 또는 은혜의 법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죄의 법을 벗어날려면 죽음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갈려고하니 율법이 가르쳐 주는 길을 가야하지만 갈수도 없고 이게 참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는것인데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가면 바로 생명의 법이 나옵니다. "죄의 법"에서 자유할려면 "죽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전체의 죽음으로 자유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법"은 성경에서는 "아담 한명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한것처럼 한 사람으로 죽음과 부활로
모든 사람이 죽고 산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바로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고 또한 율법(하나님을 만나는법)의 요구 조건도 동시에 충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19)
따라서 로마서는 결국 두가지의 법의 싸움입니다. "죄의 법"과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법(십자가)"이 "죄의
법(원죄/자범죄)"에서 우리를 '자유'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법인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생명의 법"이 우리를 성령으로 하나님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율법을 따라 살지않고 생명의
법아래서 "성령"의 인도함으로 따라 산다고 고백합니다. 더 감사한것은 전에는 죄의 "노예"의 신분이였는데 그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준것도 감사한데.. 이제는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은혜" 그 자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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