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다윗의 범죄와 사건의 재구성

다윗의 범죄와 사건의 재구성
시간:저녁
장소:지붕(the roof of the palace)
지붕에 올라간이유: 범죄의 재구성의 핵심...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11:2)"

1.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사건의 발단은 왕궁 옥상에서 밧세바를 본것이 사건의 발단입니다. 이 본문에 대하여 이야기할때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원인을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지 아니함을 이유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다시 꼼꼼하게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을수 있으닌깐요. 정말 다윗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낮잠을 자다가 심심해서 옥상에 올라갔기에 범죄하게되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아니하였을까.. 생각해봤습니다.

2. 저의 생각은 다윗은 "기도"하러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근거1:시편55편은 다윗이 적은 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55:17)

다윗은 시편55편에서 그의 기도생활을 언급합니다. 저녁, 아침, 정오에 내가 기도하는듯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궁 옥상(지붕)에 올라간 시간이 바로 <저녁>입니다.

근거2:지붕에서 올라가서 기도하는것이 일반적인 일: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행10:9)

사도행전에서보면 제자들이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고 다니엘서에보면 다니엘이 하루에 세번기도할때 사람들이 다 볼수 있었기에 그를 고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다니엘도 사방이 뚤려있는곳(지붕같은곳)에서 기도하였음을 짐작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2. 기도하러 갔던 다윗이 범죄를 하다...이게 말이되나요? 제가 아는 어떤 친구가 이런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이 될때 그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닌하는 나의 모습을 볼수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55편에서 기도하로 올라간 이유가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근심하며 탄식하였는데 이유가 자신이 너무 원통하고 급박한 상황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이 지붕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의 모습에는 "근심하며 탄식"이 없었던것이 아닐까요? 저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많은 신앙생활의 모습이 분명 좋은것이지만 다시한번 내가 왜 이렇게 행하는 이유를 돌아봄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습에 조금더 가까워질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볼점:
1.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이 될때 무슨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마7:6,8)"
1

용감한 자의 리더 vs 환난 당한자의 리더

용감한 자의 리더 vs 환난 당한자의 리더

1.사울 (용감한자의 리더)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직책을 줄수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이 있었기에 그는 "힘 센"사람이나 "용감한"사람들을 그의 주변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사실 용감하고 힘센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 너무 의지하다보면 중요한것을 놓칠수 있는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울 자신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이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삼상14:52)"

2.다윗 (환난 당한자의 리더)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서 동굴로 피하여 다였습니다. 다윗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세상에 소망과 희망이 없는 "환난 당한"사람이나 "빚진"사람 그리고 "원통한"사람들이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기뻐하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것 같습니다. 사울왕에 쫓겨서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자같고 원통한 마음을 소유한 자신을 보았을것같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다르게 사람들을 의지한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봐주고 친구가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더 의지할수 밖에 없었을것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22:1-2)"

3.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때 많이 배운 학문이 있는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어부같은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함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고전1:27)"고 하신것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실력과 나의 주변환경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 또한 가릴수도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집중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것 같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4:18)"

*생각해볼점:
1. 예수님은 주변 사람(환경)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6:34)"

2.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집중하여야 할것은 무엇일까요?

"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61:1)"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
(길르앗 야베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삼상31:11,13)"

1. 사무엘 이후로 처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사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한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사울 스스로 말을 합니다. '베냐민 지파 가족중 가장 미약한자'가 바로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울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0:2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따라서 사울의 인기가 그렇게 좋은것은 아니였던것 같습니다. 이 사울의 인기를 한번에 바꾼 사 건이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였습니다. 암몬(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굴욕적인 계약을 하자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눈이 되는 조건으로 평화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도움을 요청하고 만약 도울 자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외눈이되는 계약을 이행할려고 합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삼상12:2,11)"

2. 사울이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암몬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합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진정한 왕의 권위도 얻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도 구합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사울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 마지막으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자살을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의 갑옷은 자신들의 신전에 놓아두고 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 이말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자신들은 작은 마을 사람들이고 블레셋은 강한 나라입니다. 잘 못하면 다 죽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르얏 야베스 사람들은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서 내려고 장사를 지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그 은혜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것같습니다.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울의 은혜를 기억했던 길르얏 야베스 사람들은 그의 은혜를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사울을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함으로 대신합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다윗에게 들립니다. 다윗은 그들을 크게 칭찬해줍니다.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삼상31:12)"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삼하2:5)"

3. 우리는 사울이 나쁜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것 입니다. 하지만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다윗"입니다. 당대의 영적 지도자는 사울의 타락함과 죽음을 너무 슬퍼하였습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영적 지도자(조장, 셀장, 간사, 직분자, 목회자 등등)들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할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앞에가서 용감하게 말해야할까요? 아니면 모른척해야할까요? 사무엘에게서 그 답을 찾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사무엘은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에게 이와같은 아픔이 없다면 우리는 회개하여야 할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앞에서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것이라 믿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가 없다면 사람들앞에서 잠잠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15:11)"

*생각해볼점:
1. 그 은혜를 생각하여 밤새도록 달려갔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달려가야할까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1. 사무엘의 시대가 열리기전 엘리 제사장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낳은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주셨다고 한나가 하나님께 다시 드립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아들은 전쟁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목숨을 잃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았겼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엘리제사장은 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언약궤를 동일시 하였던것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을까요?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상 4:11, 22 KRV)"

2. 이제 사무엘이 제사장으로 직분을 다 합니다. 그가 했던것은 미스바로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한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모여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격을 옵니다. 절대절명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새롭게 사사가된 사무엘은 아직알려지지 아니한 사람이고 이스라엘에 언약궤도 없으니 사람들은 두려웠던것은 당연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블레셋은 천둥소리때문에 겁에질려서 도망을 갑니다. 사무엘이 그 이후로 법궤를 찾을려고 했는지 아니했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언약궤를 의지하는것보다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을 택한 사람 같습니다. 물론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엘리제사장의 두아들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않고 언약궤를 의지하는것보단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의지히는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잘나타나는것같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사무엘상 7:4, 5, 10 KRV)"

3. 지금 현재의 우리의 신앙에서 언약궤는 무엇일까요? 저의 생각인 우리가 의지할수 있는것 이라고 정의하고 본다면 아마도 "주일성수" "헌금" "전도" "봉사"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언급한 위의 몇가지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위의 몇가지를 의지한다고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볼수 없을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위의 것도 잘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잊지말아야할것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것같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KRV)"

* 생각해볼점:
1.그럼 지금 법궤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열왕기하 20:16, 17 KRV)"

신 벗김 받은 자 vs 기업 무를 자

신 벗김 받은 자 vs 기업 무를 자

1. 이스라엘 전통 중에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전통 중이 "기업 무를 자"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재산 상속이 남자에게만 전해집니다. 그래서 가족중에 남자가 없으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기업 무를 자"입니다. 즉 가까운 친족(가족)중에 형제가 죽어서 대가 끊어질것 같으면 대신 그 가족의 대를 이어줄 자녀를 낳아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그 낳아준 자녀는 죽은 형제의 자녀가되고 재산도 나눠줘야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신25:5)"

2. 구약성경에선 유다의 자녀중에 이런일이 있었고 그리고 룻기에서도 일어납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성경 부분이 룻기입니다. 룻기1장에서 사사가 치리하던 때에 흉년이 들어서 엘리멜렉이 나오미와 아들 둘을 이끌고 모압으로 가서 살게됩니다. 그곳에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합니다. 하지만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도 죽어서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되고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끝까지 따라갔던 며느리가 바로 룻 입니다. 이들의 삶이 쉽지 않았을것입니다. 룻은 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먹을것을 구하러가서 보아스를 만나고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를 위해서 "기업 무를 자"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 기업 무를 자는 자신에게 재산의 손해가 나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보아스에게 그 의무(기업 무를 자)를 떠 넘깁니다. 신명기서에보면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을 "신 벗김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룻4:8)

3. 그리하여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어서 룻을 통해서 "오벳"을 낳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아들을 얻게됩니다. 이 옷벳은 결국 전통적으로는 엘리멜렉 과 나오미의 아들이 되느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엘리멜렉집안)는 보아스로부터 기업(재산)을 얻게됩니다. 이 기업 무를자의 의무를 다하여서 보아스와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게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신 벗김 받은 자"는 자신의 재산을 유지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한 사람이 되고 말합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4:17)"

4. 성경에서는 이 "기업 무를 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남자가 없는 집에서는 스스로 그 가정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유산상속이 남자를 통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이죠. 결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기업 무를 자"가 있어야지만 그 가정이 이 문제를 해결할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문제를 해결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기업 무를 자"를 상징합니다. 레위기에서는 형제가 가난하여서 어쩔수 없이 땅을 팔았을 경우에도 그에게 가까운 사람(친족)이 대신 그 값을 지불하고 토지를 사서 돌려줘라고 합니다. 이 사람도 "기업 무를 자"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해본다면, 복음을 몰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것이 지금의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부탁하신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케 하여야할 가까운이웃이 있다면 우리는 "기업 무를 자"가 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누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야 할까요?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25:25)"

*생각해볼점:

1.전통에 따르면 보아스가 에봇의 아버지가 될수가 없다. 왜냐하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는 보아스가 에봇의 아버지로 나온다. 이유가 뭘까?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1:5)"

2.보아스는 첫번째 기업무를자가 아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기업무를자가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자하는 숨은 뜻이 있을까?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룻3:12)"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 언제?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 언제?

1. 사사기 이야기중에 유명한 이야기가 "기드온의 삼백용사" 입니다. 기드온은 어떤 사람이였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스스로 고백하기를 "아비의 집에서 가장 작은자"라고 말을 합니다. 정말 형제중에서 키가 작았는지? 또는 재물이 작았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 기드온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사사로 세웁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아브라함과 후처의 자녀)과 아멜렉과 동방사람들을 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한것을 알지만 그래도 염려가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부탁을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려달라고 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삿8:22)

2. 기드온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그 자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드온은 우리를 이끌고 다스리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인도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할일이 별로 없을수도 있으나 작은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자리를 인정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것 같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삿8:23)

3.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때 그 결과로 평화가 찾아오는것같습니다. 나의 삶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가장 빠른방법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며 살아요.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삿8:28)

기생의 아들 입다

worthless men
(기생의 아들 입다)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사사기 11:1, 3, 4 KRV)"

1. 사시기에서 기생(창녀)의 아들로 사사가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사 입다입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쫓겨서 잡류(worthless men) 와 함께 생활을 합니다. 잡류? 가 궁금해서 영어를 찾아보니 가치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입다가 사사가된 이유는 바로 암몬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였기 때문입니다. 암몬은 롯의 자손으로 아브라함의 친척입니다. 모세가 광야생활에도 가나안정복에도 암몬의 땅을 침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암몬이 이제 이스라엘을 대항합니다. 어쩔수없는 위급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입다에게 찾아옵니다. 만약 위급한 상황이 아니였으면 창녀의 아들을 부르지도 찾지도 아니하였겠지요. 평온했다면 혈통 좋고 흠모할만한것들이 많은 사람을 사사로 세웠을겁니다.

2. 저는 사사 입다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느꼈습니다. 흠모할것 하나없는 사람이고 잡류의 친구였던 사사 입다가 예수님하고 비슷한점이 있어요. 성경에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연한 순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것이 없는 사람이라고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KRV)"

3.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셨습니다. 그리고 시골 나사렛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날수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모습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이게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은 예수님을 거절했는지도 모릅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요한복음 1:46 KRV)"

4. 입다의 삶을 보면서 현재 우리가 생활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아직 우리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교회에서 지체들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중에 가장 작은 지체를 귀하게 쓰실수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아직 부족해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수도 있어요. 연약한 지체의 믿음이 어쩌면 우리보다 더 좋을수도 있는것같습니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고린도전서 12:21-23 KRV)"

5.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지체를 바라보아야할까요? 지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작은 소자에게 한것이 바로 나에게 한것이 바로 나에게 한것이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지체를 바라보아야겠어요.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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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유언

여호수아의 유언

우리는 인생을 가끔씩 돌아볼 때가 있는것같아요. 일을 성취했을때나 아니면 더 이상 일을 행할수 없을때... 여호수아는 죽기전에 유언을 합니다. 그가 마지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 궁금하죠. 믿음도 좋고 용감하고 전쟁에서 한번빼고 늘 승리했던 리더였습니다.

분명 유언을 할때 "나를 본받아라" 말을 충분히 할수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무엇을 강조할까요? 그렇게 열심으로 충성된 삶을 살았던 여호수아...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자랑할것이 생기면 한번 여호수아와 비교를 해봐요. 여호수아만큼 자랑할것이 있으면 멋지겠죠? 그때 여호수아처럼 자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남아있으면 좋을것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편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 내었으며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 같이 한 것이 아니며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 24:1, 2, 8-14 KRV)"

나는 어디로 도망갈까?

나는 어디로 도망갈까?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것이니라 (여호수아 20:2, 9 KRV)

1. 여호수아가 각 지파의 동네마다 도피성을 지명합니다. 이 도피성으로 살인자가 도망을 가면 목숨을 유지할수있습니다. 왜? 이런 성을 지명했을까요? 도망자는 스스로 목숨을 유지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도피성에 들어가면 재판 때까지 안전할수 있습니다.

2. 싸움중에 가장 높은 고차원의 전략이 도망같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신앙의 고수들은 "도망(리트릿)"을 잘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내힘을 믿고 나아가도 승리할수도 있게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나의 승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승리가 안될수도 있기 때문같습니다. 신앙생활의 승리는 하나님께 잘 도망가는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편 91:2 KRV)

3. 옛날처럼 요즘은 주변을 둘러봐도 "도피성"이 없어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도망가야할까요? 성경에선 도피성은 예수님입니다. 도피성(예수님)에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내가 힘이들고 낙망했을때 무엇을 바라보아야할까요? 바로 도피성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지쳤을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힘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 나의힘이 아닌 십자가를 의지하는자.. 그 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시는 분들같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늘 나의 힘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기도할수 있지만 십자가를 더 의지하도록 기도하는것도 좋은것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KRV)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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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스라엘의 장자지파인가?

누가 이스라엘의 장자지파인가?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 17:17 KRV)"

1. 물론 아주 간단하고 초보적인 질문입니다. 저는 이런것을

고민하기 좋아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읽다가 여호수아가 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에게 말을합니다. "한분깃만 가지지말아라" 이게 무슨말이냐면 너희는 땅을 더 차지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 이스라엘 장자들이 차자보다 유산 상속에서 두배를 받을때와 비슷한것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그럼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장자지파인가요? 그리고 이름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아니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인지도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2. 르우벤 vs 유다 vs 에브라임(요셉의 둘째)
제가 위에 적은 지파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지파입니다. 과연 누가 이스라엘의 장자지파의 명분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호수아서 본문을 보면 에브라임같은 느낌이 상당히 강합니다. 아니면 그냥 축복의 말일까요? 한번 차례로 살펴봤습니다.

3. 르우벤 지파
육신적으로는 분명 야곱의 첫번째 아들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장자의 명분이 있습니다. 당연히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도 이점을 인정하지 아니했을까요? 그럼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할까요?

성경말씀: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창세기 35:22 KRV)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창세기 49:3, 4 KRV)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역대상 5:1 KRV)

4. 에브라임(요셉지파)
에브라임과 요셉지파는 같은걸로 하겠습니다. 요셉의 아들이거든요. 먼저 요셉이 사실 이스라엘에 지파로 들지 못하는 이유는 아시겠지만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양자로 입양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고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입니다. 창세기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셉만 좋은옷을 입었어요. 그럼 성경에서는 에브라임(요셉)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까요?

성경말씀: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창세기 48:14-16, 20 KRV)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창세기 49:22, 24-26 KRV)

5. 유다지파
우리는 당연히 유다지파가 장자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유다는 레아의 소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난 지파입니다. 그럼 중간에 요셉지파에서 장자권이 유다지파로 넘어간것일까요? 아니면 장자권은 요셉지파에있고 메시아만 유다지파에서 태어난것일까요? 저는 이게 어렵네요.

성경말씀: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세기 49:9, 10 KRV)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신명기 33:7 KRV)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역대상 5:2 KRV)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시편 78:67, 68, 70-72 KRV)

6. 여러분은 누가 이스라엘의 장자지파라고 생각하시나요?

2013년 4월 23일 화요일

작은글모음

우리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무슨 그림인지 처음에는 모른다. 그러나 그림이 끝날때 우리는 이해한다. 왜 그사람이 처음에 그렇게 했는지... 성경 말씀도 그런것 같다. 시작에서 고민을 할수도 있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속에서 처음을 찾아간다면 그림 그린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수 있듯이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수 있는것은 성경전체의 그림을 볼수 있다면 우리가 고민하는 한구절 한구절이 조금더 분명하게 보여질것같다.


그 렇게 길지 않는 신앙생활이였지만 복음에 대하여 고민은 조금해본것같다. 소망을 잃어버린것 멜번 같았는데... 그건 단지 나만의 생각이였던것같다. 작년 1-3월간 멜번에 하나님의 소원을 품은 교회가 있기를 소망했던 기도를 드렸다... 담이 없는교회 참 재미있는 교회이다. 성도와 목회자가 서로 아껴주는것은 세워주는 것은 어느교회를 가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성도가 목회자를 사랑하는것보다 목회자가 성도를 더 사랑하는 교회는 흔하지 않다. 담이 없는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성도를 더 많이 사랑하는것같다. 이것이 분명히 보인다. 행복한 교회이다. 성도가 행복한지 모르는것 또한 은혜 같다.
사 람에게 감동을 주는것과 그 사람의 변화게 하는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하늘과 땅차이이다. 그것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였다. 경건한 삶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만 죄인들의 친구였던 예수님은 그들을 변화시켰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왜 나의 삶의 주변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그답은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KRV)

무엇을 자랑하사겠습니까?... 은혜에서 시작되고 은혜로 끝났으니 농공행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원은 이런것같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쳤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이 그 사이에 있다할찌라도... 시작도 끝도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마음이 빼긴자의 아픔

마음이 빼긴자의 아픔

욥기3장을 보면 욥의 처절한 통곡이 나옵니다. 이유는 욥이 엄청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종들과 가축을 잃었고 자녀도 잃어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건강도 아내도 잃어버립니다. 욥기 3장은 그런 자신의 잃어버린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슬픈 이유는 그만큼 욥이 거기에 마음이 빼았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빼았긴것 만큼 아픈법이지요.

하나님도 마음이 빼았겼어요.
어제 이루다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손바닥에 새겨서 우리를 기억하신다.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사야 49:16 KRV)" 이 말은 무슨 말이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날마다 보고 또 보고 기억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잃어버렸어요. 창세기엔
이렇게 말합니다. "보기에 좋았더라" 그걸 잊어버린거에요. 성경에서는 우리를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탕자로 표현하면서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표현하고있습니다. 지붕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 것을 이사야서에선 손바닥에 새겼다고 표현한것입니다. 잊지못하고 손바닥에 세겨서 기억하고 매일 그리워합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욥은 욥기3장에서 탄식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떨까요?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것같습니다.

조서는 폐하지 아니한다

조서는 폐하지 아니한다

에스더서는 어쩌면 조서와 조서의 싸움입니다. 문제는 그 어떤 조서도 왕의 인이 있으면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왕 자신도 그것을 없이 할수 없습니다. 스스로 묶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에 묶입니다. 웃기지요?

이게 참 성경에서 중요한것같습니다.
"sealed with king's ring" 왕의 반지가 찍혀있는 명령은 반드시 시행되어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 말씀은 반드시 없어지지 않습니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8 KRV)"

이게 또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아담(사람)에게 명령을 합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7 KRV)" 결국 아담(사람)이 가진 모든 권세 아래있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언약)가 깨어지면 결국 영원한 죽음(하나님으로부터 분리)으로 갈수 밖에 없게되었습니다.

이걸 바꿀수는 없고... 역시 하나님은 다른 조서를 내려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원시복음이란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5 KRV)" 다시 하나님은 새로운 조서(언약) 관계를 성립시킵니다. 따라서 이 조서가 완성되는 날이 바로 회복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바로 이 회복을 이루신 증거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사귐을 이룰수 있게 길을 열으셨습니다.

성경은 큰 두가지 조서가 싸우고 있습니다. 조금 이상할수도 있는데 ㅋㅋ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 라고 합니다. ㅎㅎ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2 KRV)"

오늘은 부활절이라서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서 성경전체에 흐르는 언약으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이는 전적인 저의 소견이니 ㅋㅋ 그냥 가볍게 넘어가 주세요^^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니 십이월 곧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에스더 3:10, 13 KRV)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찌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취소할 수 없음이니라 (에스더 8:8 KRV)

부흥

부흥

성을 건축하고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때 사람들이 울어요. 그리고 백성들이 계속 말씀을 듣기 위해 에스라에게 나아옵니다. 이것이 부흥이 아닐까요? 말씀을 더 알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 이것이 교회 부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이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그 이튿날 뭇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느헤미야 8:8, 9, 12, 13 KRV)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때 성전과 성을 건축할때 매번 방해가 있었습니다. 참 신앙생활하기 힘든때입니다. 어쩌면 지금하고 비슷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주변에 신경쓰고 돌아볼것이 너무 많아요. 느헤미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싸우라" 그리고 어떻게 성을 쌓았냐면 "한손"으로 일하고 "한손"은 병기를 잡았습니다. 저의 생각엔 이것이 요즘 우리가 필요한 신앙생활의 모습같아요. 교회에서 우아하고 고상하게 신앙생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세상의 시험과 도전에 준비된 모습으로요. 이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것같습니다. "다니엘김" 선교사님이 말하는 "철인"같은것은 아니구요 ㅋㅋ 세상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읽어보면서 "내가 참 돈에 대하여 모르고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ㅋㅋ 하여간 요즘처럼 바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포로귀환때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을 건축하는 자세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같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처럼..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찌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느헤미야 4:14, 17, 18, 21-23 KRV)

긍휼히 여김을 입었다

긍휼히 여김을 입었다
(하나님만 보이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바벨론에 망하고 바사왕때까지 이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어떻게 할수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노예가 되었기에 왕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성을 수리하는것이나 성전을 제건하는것 조차도 이방 왕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말하기를 "악한 행실과 큰죄" 때문 이라고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거스려서 행한 범죄입니다. 당연히 우상숭배입니다. 이방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의지했던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포로된 상황속에서 한가지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이유는 우리가 행한것에 비하여 하나님께서 약하게 우리에게 쳤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바로 "얼마를 남겨 두었다" 입니다. 참 신기하죠? 그리하여 아무도 하나님앞에 감히 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들이 고백해야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대로 우리에게 행하였다면 아무도 남아있지 못하는것같습니다. 그 얼마 남아있지 않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일을 하십니다. "남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불평하지만 완전히 망하면 찬송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의지할것이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한가지 나눌려고합니다. 오래전에 유럽을 여행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돈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참 신기한것은 그때 정말 평안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때 제가 기도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뭐라고 기도 했냐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 정말 하나님 밖에 안보입니다." ㅋㅋ 이렇게 기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 올랐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헐... 영어로된 사영리 소책자를 꺼내서 못하는 영어로 앞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영어공부하는데 이거 한번 읽어주라" ㅋㅋ 착한 외국인은 사영리 전체를 혼자서 열심히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혼자서 끝까지 다하더군요. 영어가 짧아서 제가 할수 있는게 그게 다였어요. 이제 고민이 되네요. 어디로 가서 짐을 풀까? 하고요. 그때 민박집에 갔는데 주인에게 한가지 요청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돈이 없습니다. 제가 돈이 생기면 드릴테니. 하루만 잠을 청할수 있을까요?" 그 주인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집엔 방이 있고 먹을것도 있으니 돈 걱정말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고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떠나시면됩니다" 그말을 듣고 저는 조금 충격에 빠졌어요 ㅋㅋ 하여간 그때가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만 보일때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입니다" 지금 다시 그일을 당하면 자신이 없네요 ㅎㅎ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복역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성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에스라 9:9, 13, 15 KRV)

성경을 보는 관점

성경을 보는 관점의 전환

성경은 어떻게 봐야할까? 또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해야할까? 어렵다. 신명기에서는 여호와의 성회에 참여하지 못할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이사야서에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말씀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다. 혹시 나는 내가 원하는 말씀만 붙잡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아래의 두번째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성전에서 화를 냈다. 사람들은 거룩한 성전 정화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앞에 나오는 구절을 알고 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사람들은 기도하는 집에 촛점을 둔다. 예수님은 만민에 촛점을 두었을수도 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혼냈던 곳이 어딘줄 알면 그 뜻이 더 분명하다. 바로 "이방인의 뜰"이다. 이방인들이 예배하는 장소가 장사꾼들로 가득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만민이 기도하는집"은 무엇을 강조하기 위함일까?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해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한번 고민해볼일이다.

1.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명기 23:1-3 KRV)

2.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사야 56:3, 4, 7 KRV)

3.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마가복음 11:15-17 KRV)

출애굽의 시작과 끝 그리고 교훈

출애굽의 여정의 시작과 교훈

1.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2:23)

2.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출5:21)

3.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출14:11)

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15:24)

5.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3)

6.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17:3)

7.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32:1)

8.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민11:1)

9.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민11:4-6)

10.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민14:2-4)

11.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민14:10)

1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민16:2)

13.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민20:3)

14.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민21:5)

15.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민25:2)

16.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민26:25)

17.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신3:25-26)

18.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섰을 때에 염병이 그치니라(민16:48)

민수기16장에 보면 사람들이 당을 짓고 스스로 높아져서 모세와 아론을 대항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하시매 그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민 16:45)" 전부 멸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 모세와 아론은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자와 산자 사이에 그들은 섰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불렀을때 그들에게 분명 축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세와 아론의자리는 어디였을까요?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앞에서 "엎드린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자리 즉, 그들은 자신이 죽을수도 있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서 사이에 섰을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습니다. 만약에 모세와 아론이 그자리를 지키지 않았으면 이스라엘백성 전부가 염병에 죽었을것입니다.

모세와 아론같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일수도있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죽은자겠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삶의 자리로 부르시는것 같습니다. 바로 세상과 하나님을 화평케하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길 원하시는 것같습니다. 저는이 자리를 "중매쟁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세상(죽은자)에 그리스도(생명)을 소개시켜주는 중매쟁이의 삶으로 우리를 불렀을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내가 있어야할텐데...

회복의 계명



묵상말씀: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레26:41-42)

1.회복의 법?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속에 행위가 없는 율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본적이 있습니까? 레위기가 총27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26장에서 마지막부분에 행위로 행할수 없는 율법을 한가지 언급합니다. 바로 회복의 율법인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것은 보여지는 행함이 아닙니다. 하지만 레위기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중요한 법같아요. 이 율법을 행하면 무슨일이 일어나냐면 바로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법을 <회복의 법>이라고 한번 이름붙여 보았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형벌을 기쁘게 받아라"입니다. 그리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인용성구: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26:45)

2. 율법중에 유일하게 스스로 행하지 못하는법이 있는가? 저는 이 마음의 할례가 과연 스스로 가능한 율법인지 한번 고민을 해봤습니다. 할수도 있고 못할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모세는 그의 유언과같은 신명기에서 광야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풀어주길 원한다 그리하여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과연 마음의 할례는 누가 행하는것일까요? 나인가요? 하나님인가요?

인용성구: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3. 할례는 무엇을 말하는가? 할례는 행한다는 의미는 뭘까요? 율법의 마지막에 가서 마음의 할례를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요? 진정한 할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같습니다. 저의 생각엔 마음의 할례는 "나의 마음의 왕자의 주인이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삶"이 바로 마음의 할례같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스스로 안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다스려달라고 기도하는것 같아요. 그러면 모세가 언급한 신30: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의 할례를 우리에게 행하시는것 같습니다.

인용성구: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2:11)

4.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보여지는 할례(율법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수 있으나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 처럼 보여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할례"처럼 나를 낮추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임을 날마다 고백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것 같습니다.

인용성구: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29)

나를 기억해주세요

러브레터~
(나를 기억해주세요~/ Remember me~)

1.당신이 나를 일년에 3번만 찾아와도 나는 당신이 나를 계속 기억해주는것으로 믿겠습니다.

말씀: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신16:16)

2. 그러나 나는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잊어도 나는 당신을 잊지 않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고 당신을 항상 매일 순간순간 기억하고 당신을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항상 나의 앞에 놓고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말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49:15-16)

3. 내가 당신을 위해서 나의 전부를 드려도 아깝지 않아요. 단지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나를 잊지 아니하길 원합니다.

말씀: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11:24-25)

4. 그러나 나는 알고있어요. 당신이 나를 떠나서 나를 기억하지 못할때도 있다는것을 나는 알고 있어요. 다시 나를 기억했을때 생각하세요. 당신이 나를 잊은 그 시간동안 나는 늘 혼자가 아니였기에 나에게 돌아오는것을 힘들어하지마세요.

말씀: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요16:1,32,33)

5.내가 당신과 지금 함께 하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당신께 두고 갑니다. 나는 늘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그 날을 기다리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말씀: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6,13)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26:29)

율법에서 의로움 찾기

율법에서 의로움을 찾을수 없는가?

1. 바리세인은 스스로 의롭게 생각했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누가복음 16:15 KRV)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18:9 KRV)

2. 바울은 정말 율법에 흠이 없던 사람인가?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립보서 3:5, 6 KRV)

3. 어떻게 바리세인과 바울은 스스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특별한 예외조항이 있지 않을까?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 (레위기 6:7 KRV)

4. 예수님은 율법을 다시 재해석하셨던 이유는 뭘까?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태복음 5:21-48 KRV)

5. 예수님은 바리세인이 의로운 자가 아니라고한 이유는 어디서 나온것인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5:8, 9 KRV)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누가복음 7:30 KRV)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3 KRV)

6. 율법의 의를 만족 시킨 사람들은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인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히브리서 11:24, 26, 28 KRV)

7. 구약과 신약의 구원의 기준은 다른것일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KRV)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KRV)

선한사마리아인 그리고 네마리 비둘기

선한사마리아인 과 네마리 비둘기...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5)

선한 사마리아인은 두개 "데나리온"을 주면서 죽어가던 사람을 주막에 맡깁니다. 데나리온은 성경에 나오는 화폐의 단위인데 하루일당이 한개 데나리온 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틀치의 자신의 일당을 생명부지의 사람을 위해서 주고 그리고 나머지 더 필요한것을 돌아올때 주막주인에게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1 드라크마 = 1 데나리온 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화폐단위가 많이 나옵니다. 그 당시에 이 화폐로 할수 있었던것이 1개의 데나리온으로 비둘기 두마리를 구입할수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2개의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비둘기 네마리값을 지불한것입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비교한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보겠습니다.

저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비교대상이 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과 레위사람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알았던 사람이지요... 유대 율법에는 시체를 가까이 하면 부정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아니함으로 자신을 부정하는것에서 벗어날수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따질수 없을것도 같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율법을 너무 잘 알았다는 예로 예수님을 비교를 할때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이들이 어떻게 부정하게 되는지도 알지만 또한 어떻게 정하게 되는지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요. 그들이 부정해져도 다시 정해지는 절차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러면 어떻게 깨끗하게 될까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들 곧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레5:2)

그 깨끗하게 하는 절차가 바로 "속죄제"입니다. 희생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번의 사체를 인하여 부정하게 되었을때 그들이 지불해야할 가장 작은단위의 희생제물이 뭘까요? 바로 "산비둘기 두마리"입니다. 이것을 돈으로 따지면 바로 1 데나리온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첫번째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레위 사람과 제사장은 바로 1 데나리온을 아끼기 위해서 그 죽어가던 사람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2데나리온을 지불하고 돌아와서는 그 나머지도 지불할려고 했습니다. 유대의 율법을 아는 사람(제사장,레위인)은 산비둘기 두마리를 한명의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보다 가치 없게 여겼을까요?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저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자신의 의로움이 기준이였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의로움의 기준을 이웃사랑으로 전환하라고 가르치고 있는것 같습니다. 만약에 제자이 자신의 부정케 되는것이 문제였다면 예수님의 예화에 답하기 곤란했을수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질문의 기준을 "자신"에서 "이웃"으로 기준을 변화 시킵니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냐? 이게 참으로 중요한것같습니다. 우리의 선의 행함의 기준은 "내가" 되면 안되고 바로 "이웃"이 기준이되어야합니다.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레5:6-7)

내가 지나가리라

내가 지나가리라..
(바타르)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15:8)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15:17)

약속의 증거를 요구했던 사람들... 구약에서 약속의 증거는 무엇을 의미할까?
성경은 어쩌며 약속에서 약속의 성취로 끝난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성경책 이름이 "구약" "신약"이렇게 부른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만의 추측입니다. 우리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분들이 왜 중요하게 생각하냐면요..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할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설명하십니다. 이유는 당연히 그들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볼려고 합니다. 요즘 모세 이야기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주 듣습니다. 보면 볼수록 모세가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알아갑니다. 약속은 늘 시작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사람은 그것에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 약속의 증거를 주세요... "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약속을 말하고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그걸 어떻게 알죠?"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의 증거를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증거를 주십니다.

언약의 증거가 참 재미있는데요. 반석위에 동물을 쪼개고 그 사이를 하나님(횃불)이 지나가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행하였던 약속의 증거로서 제물을 쪼개어 마주 놓고것의 의미는 그 당시에 제물을 쪼개어 마주 보게 놓고 계약자 쌍방이 그 가운데로 함께 지나가는 계약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계약 위반자는 쪼개진 제물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언약의 원뜻이 "쪼개짐" 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제물 사이를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레미아서에 이 언약의 증거의 뜻을 설명한 곳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나가셨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내가 반드시 지킨다"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하게됩니다.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렘34:18-19)

모세는 신명기서에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전에 마지막으로 설교를 합니다. 광야40년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고 그리고 우리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잘 따랐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의로와서 인지?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그 땅을 얻을 이유는 너희에게서 찾을수가 없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모세는 결론을 내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9:24)

율법을 어떻게 볼것인가?

율법을 어떻게 볼것인가?
(수건이 벗겨지리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4-17)

우리의 신앙생활중에 늘 고민하는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과연 율법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참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바리세인들은 무엇을 잘못 본것일까?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고 있습니다.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구약은 모세오경을 의미하겠지요? 유대인들의 자랑인 모세가 쓴 구약을 읽을때 무엇이 문제였냐면 바로 "수건"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수건이야기가 왜? 나올까요? 제가 출애굽기를 지금 읽고 있거든요. 모세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할때 얼굴에서 광채가 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고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줄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어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출34:35)

율법을 올바로 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바울사도는 주께로 돌아가면 구약을 읽을때 마음을 덮었던 수건이 벗어진다고 합니다. 그때 자유가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율법을 이해할려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면 이해를 할수있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또는 마음을 덮었던 수건이 벗겨졌으니 성령님의 은혜로 율법을 바르게 이해할수 있다는 뜻일수도 있는것 같아요. 또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누군가를 통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과 대화한다 또는 기도한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넘어가리라

넘어가리라.... (When I see the blood, I will pass over you)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12:13)"

어렸을때 교회를 다니다 보면 우리는 간혹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사탄에게 빚을 지불하고 우리를 건져내는 것으로 배웠거나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관점이라고 볼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빚을 진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왜? 중요하냐면 그관점을 정말 잘 설명해놓은것 같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의 다른말로 하면요. <여호와의 밤>(출12:42) 이라고 합니다. 그날은 사실 심판의 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누가 그날을 심판을 하는지 그리고 "그날의 주인"은 누구인지 볼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2:13절의 주어를 보세요. 바로 "내가"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 심판의 날의 주인입니다. 그 심판의 날의 기준이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 있으면 된다는것입니다.

왜? 이렇게 피가 중요했을까요? 저는 사실 창세기 3장으로 가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이것을 언약(구원)의 약속의 증거(피)에요. "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9:18)" 이것이 바로 창세기 3:21절을 의미한다고 볼수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의 증거(피)로 "의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피"를 드리는 행위의 율법으로 전락하면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 담겨있는 "피"는 "어린양의 피" 즉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거든요. 이 "피"가 바로 믿음의 근원인 예수님으로 연결되어져야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따라서 이 부분을 잘 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증거(율법/피)는 그 언약(구원/예수/복음)의 표에요. 그렇다고 해서 증거를 잘 간수한다고 구원받는거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증거(제사)가 믿음으로 언약(예수)하고 연결되어야하거든요. 그래서 성경이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언약의 대상인 "예수그리스도"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9:32)"

한가지더 언급한다면 유월절 밤에 사람들이 무엇을 했냐는것을 볼 필요가 있어요. 사람들이 그날밤(여호와의 밤/유월절)에 밖으로 나오면 안되고 그 피바른 집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바로 양의 고기를 밤동안 먹어야해요. 저는 이부분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구원받은 표인 양의 피를 바르고 그속에서 "양"을 먹는다? 이거 어디서 본것과 비슷하지 않아요? 이 유월절이 신약에서는 "성찬식"하고 비슷한것 같아요. "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전10:16)".... 비슷하죠?

따라서 구원받은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기념(고전11:24)하는것이 유월절의 의미같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인 의미는 저는 구원받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묵상한다는 의미같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갈려면 결국은 말씀을 가까이 해야하는것같아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매일 매일 말씀을 가까이하여서 우리 함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요.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출12:8-10)"

우슬초 이야기

우슬초(Hyssop) 이야기..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7)

저는 우슬초로 어떻게 나를 정결하게하지? 라는 생각을 전에 해봤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범죄후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시편입니다. 우슬초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슬초는 벽이나 담 위에 자라며 향기가 짙은 꽃과 잎이 있는 작은 식물이라고 어떤 사전에 나옵니다. 이 우슬초는 말린상태에서 보관을 하면 몇년이 지나도 그향을 간직하고 있기에 민간요법에서는 방부제나 독을 제거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요리할때도 사용할수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것은 이 우슬초가 벽이나 담에서 자라면 향기가 짙지만 토양이 좋은곳에 자란 우슬초는 향기가 약하다고합니다. 신기하죠? 우슬초가 처음 성경에 언급한것은 출애굽기 유월절에 양의 피를 발라서 문설주에 바르는 의식에서 나옵니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출12:22)

따라서 다윗은 시편에서 고백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슬초로 씻어 달라고 하는 것은 피 묻은 우슬초로 자신에게 뿌려서 피로 덥는다는 뜻이에요. 다윗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했던 사람임을 예수님이 언급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22:45)" 다윗은 우슬초의 피가 진정한 약속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것을 알았다고도 볼수 있을것같습니다. 우리를 깨끗게하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모습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언약의 피)"에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길 같아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28)"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22)"

요셉을 하나님이 기억함

요셉을 기억함...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40:23)

요셉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그것도 억울한데 술 맡은 관원장이 풀어나면 자기가 도와줄것처럼 해놓구선 요셉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요셉을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러나 요셉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을 기억해야하는지 생각해봅시다. 창세기를 한문장으로 요약을 한다면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정말 이렇습니다. 언약이란 약속을 말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약속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고 완성시키십니다.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많이 보았을것 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왜 이런 구절을 사용하는지와 이 이야기가 요셉하고 어떻게 연관이 되어있을까요? 그럼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하나님이 하였던 언약을 보는것이 좋겠습니다.

1. 아브라함 언약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5,13,14)

2.이삭의 언약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창26:3)

3. 야곱의 언약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35:12)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늘 요셉을 기억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언약 때문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고 만 이년이 지난후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꾸게하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을 기억하게 합니다."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창41:9)"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습니다.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나중에 형들을 만납니다. 그 때 요셉은 고백합니다. 하나님는 언약을 지키시 위해 나를 이곱 애굽으로 먼저 보내었다고 그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45:7)" 이제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성취될것이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고 이제 죽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창50:24)"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시며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서 출앱굽기에서 이 약속을 이루십니다.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출3:1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출12:36,37,40)"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 성취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지금 이 언약의 약속이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신약성경 로마서에서 이것을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언약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믿음의 후손이 우리들도 언약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벧엘로 올라가자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창세기 28:17-19 KRV)"

야곱이 고향을 떠나서 형 에서로부터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꿈을 꿉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단을 쌓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그 제단이 야곱에겐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는 하나의 증거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돌아보면 평탄한 살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였는지 모르지만 그의 지혜로도 해결할수 없는 문제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감당할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땐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야곱은 다시 벧엘을 기억합니다. 자신이 환란을 만났을때 도움이였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벧엘로 나아옵니다. 세겜에서 딸 디나 문제로 도망을 쳐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벧엘로 나아갑니다. 거기에 자신이 쌓았던 단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는 증거입니다. 이 처럼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거나 신앙생활이 힘들때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증거를 기억하여야할것같습니다. 벧엘로 올라가자는 말은 아마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자는 의미일수도 있을것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다행히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중심에 있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을것같습니다.

찬송가 가사중에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예수 사랑하심은 가룩하신 말일세....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아멘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세기 35:1, 3 KRV)

구약의 탕자 이야기

구약의 탕자이야기...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13:12)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둘의 관계 이야기는 신약의 탕자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비슷한점과 다른점이 있지요. 아브라함과 롯은 다른곳에 머무르게됩니다. 롯은 소돔으로 갔고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남았습니다. 소돔은 그 당시에 살기가 좋았던곳으로 설명이되어 있습니다(창13:10). 신약에서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고 떠납니다. 탕자가 갔던 곳은 살기좋은 곳처럼 보였지만 그곳 먼 나라에서 탕자는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집의 종보다 못한 삶을 살아갑니다. 롯은 허랑방탕하지 않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전쟁 때문에 그의 재산이 다 빼았기고 노예로 잡혀가는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비슷한 모습입니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14:12)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15:13)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는 둘째가 눈물을흘리면 혼자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장자는 둘째아들에게 잘해주는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모습, 장자의 모습은 어떨까요? 먼저 롯은 사실 탕자보다 힘든 상황에 놓여집니다. 롯은 스스로 돌아올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 노예처럼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병을 이끌고 쫓아가서 롯을 구해서 돌아옵니다. 누가복음에서 나온 탕자이야기에서 참 장자의 모습을 여기서 힌트를 얻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탕자)은 사실 스스로 돌아올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포로처럼 잡혀 있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창14:16)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15:30)

우리가 조금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탕자비유에서는 큰아들은 현실의 삶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나쁜것이거나 틀린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라보아야 할곳은 아버지의 마음과 같아야하지 않을까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떠난곳을 주시하였습니다. 그 표현으로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0)"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이 희미하지만 알고 달려갔다고 나옵니다. 분명 둘째 아들은 떠날때의 모습이 아니였을텐데 아버지는 알아보았습니다. 큰 아들은 잔치소리가 들리때까지 동생이 돌아온지 모릅니다. 이부분을 보면 큰 아들은 아버지가 바라보는곳에 시선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어쩌면 하나님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맞춰가는 과정같기도 합니다. 하나님는 어디를 바라 볼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말씀을 말씀이 있습니다.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것이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것이 아닐까요?

....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4-15)

선악과와 사람의 딸

선악과와 사람의 딸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창세기 3장과 창세기 6장이 너무 비슷한거에요. 이미 신학자들이 다 분석했겠지만 저는 평신도의 관점에서 한번 보겠습니다. 창세기에 선악과를 먹은 것은 범죄이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될수있다는 사탄의 말을 듣고 범죄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리하여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사람은 단절됩니다. 그런데 너무 비슷한 장면이 창세기에 한번더 나옵니다. 저만의 생각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창세기 6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을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화를 냅니다. 저는 이부분이 분명있었던 일이겠죠. 이것의 영적의미는 아마도 우상숭배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아니한 사람의 딸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취하였다라고 나오기 때문에 이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모습같습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네피림이 나오는데 영어성경엔 거인으로 나옵니다. 이들은 영웅이라고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제 사람을 우상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모습이 땅에 가득하였고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노아 홍수로 나옵니다. 창세기 6장을 나름 재미있게 묵상해봤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6, 11, 24 KRV)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6:1-3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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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의 변화

주어의 변화 (창세기 1장 2장 3장 4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세기 1,2장과 3장의 차이가 뭘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3장에서 아담이 범죄를 하지요. 오늘은 조금 다르게 봤어요.조금 멀리서 보면요. 1장과 2장에서 엄청나게 같은 단어가 반복됩니다. 그게 무슨 단어일까요? 답은 "하나님"입니다.

1장에서 총 37절중에 하나님이 32절이 하나님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 그것도 전부 주격으로 나옵니다. 이말이 무슨 말이냐면 창조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란것을 너무나 잘보여주고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빼면 말이되는 구절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이 범죄하고 창세기 4장부터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자녀이야기가 나옵니다. 범죄는 뭘까요? 바로 주격인 하나님을 부인하는것이 바로 범죄같습니다. 따라서 회복이 뭘까요? 바로 주격인 "하나님이"... 를 회복하는것이 진정한 회복인것같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누가 "주격"인가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인때는자

두루마리의 인을 때는 자..

요한계시록에서 가장중요한 장면이 저는 5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봉인되 두루마기를 펼쳐야하거든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계5:2)" 천사가 눈물을 흘립니다. 이 두루마리의 인을 땔 사람이 없어서요. 그런데 한 소리가 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5:5)... 바로 예수님이죠.. 즉 계시록에서는 5장이 저에겐 가장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하늘보좌의 오른편에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재미있죠?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봉인을 때었다라고 볼수 있는것같아요.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5:1)"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계5:7)"

두루마리의 봉인이 때어지면 7번의 재앙과 7번째의 나팔소리가 납니다. 사실 소리가 들리는것인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10장까지 나옵니다. 마지막 7번째의 나팔소리가 나는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요.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계10:7). 저는 이 것을 다른 성경에 나와있는 것을 보면 의문에 쓴 증거가 아마도 하나님의 그 비밀이라고 말할수 있을것 같은데요.. 즉 하나님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엡2:15)라고 말할수도 있고 완성하셨다(롬10:4)라고 하셨기에 아마도 계시록 10:7절의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율법을 복음으로 이루었다는 의미로 볼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4)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하실때는 모든 세상이 예수님발아래 꿇어 복종하게됩니다. 이 때는 사람들이 원하는 원치 아니하든 어쩔수 없이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하게됩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14:11)" 그것을 계시록 14장에서 설명하는것같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때에 우리가 알듯이 성도들은 하늘의 성소로 가겠죠?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계15:5)" 바로 하늘의 성소로 들어갈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찬양을 하겠지요?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꼐 있도다".... 구원을 이루시는 주체는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하니(계5:13)"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록에선 하늘에 예비된 아름다운 예루살렘(하늘의 지성소/천국)을 설명합니다. 저의 생각엔 이곳이 지성소가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밤이 없다고 하죠? 하나님은 빛이기 때문일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세토록 왕 노릇을 한다고 나옵니다. 이 왕 노릇이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권세(창9:1)보다 더 큰 권세일것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기업(히9:15)을 얻을자들이기 때문일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계21:10,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22: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계시록을 대강 줄거리로 봤습니다. 역시 계시록을 볼때도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는것 같습니다. 결국 구속사의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네요.

7곱교회의 책망

7곱교회와 책망

계시록에 나타난 교회의 이름은 실제교회일수도 있고 지금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상징할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일곱교회에게 성령이 말하기를 칭찬할것과 책망할것으로 나눠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실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교회의 모습이 보이는것 같아요. 간단하게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묵상으로 봐주세요. 그래서 특별히 책망할것만 적어봤어요.

1.에베소교회
-(처음사랑)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2.서머나교회
특별히 책망안함.

3.버가모교회
-(우상숭배)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2:15)

4.두아디라교회
-(우상숭배)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2:20)

5.사데교회
-(깨어있으라)
깨어라...(계3:2)

6. 빌라델비아 교회
특별히 책망안함.

7. 라오디게아 교회
-(성령충만)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회가 집중해야할부분이 처음사랑, 성령충만, 하나님/그리스도를 아는지식, 멀리해야할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처음사랑), 이걸 생각해봤을때 성경에서 어떤 것을 말하는지 생각이 잘 안났는데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한번 찾아봤어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는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합니다. 즉, 처음사랑의 모습은 "잃어버린 양을 먹이는것"으로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그럼 처음사랑을 잃어버렸다는말은 "양을 돌아보지 않았다"라고 유추해봤습니다. 말씀으로 날마다 서로 세워주는 모습을 잃어버렸던것 같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21:17)"

뜨겁다는것을 생각해보니 성령충만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네요. 사실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이 왜? 필요할까? 어떤 모습에서 성령충만하지 못하다? 뜨겁지 못하다? 라고 말할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많은 은사와 기적이 나타나지만 결국은 하나의 목표때문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증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아마도 그들이 뜨겁지 못하다는것은 "예수의 증인"으로써 지상명령에 집중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이듭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삼아라(마28:19)" 이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아는지식)같습니다. 이것은 다른곳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까이 함에서 나오겠죠?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3)" 하나님을 알려면 당연히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알아갑니다. (그리스도를 아는지식)에 자라가라는 베드로전서의 말씀과 연관이 있는것 같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또는 로마서 말씀처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계속적으로 말씀을 가까이하라는 뜻으로 묵상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것이 곧 (하나님/예수님)를 알아가는것이고 믿음이 성장하는 길같습니다. 아마도 지금우리의 모습을 보면 말씀을 멀리하는 세대에 살고 있는듯합니다.

(우상숭배), 는 다양하게 이해할수 있겠지만 이것을 음행으로 설명을 많이 합니다. 남녀관계를 비유해서요. 즉 신랑과 신부(교회)관계에서 교회가 하나님을 찾지않고 다른것에 의존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것같아요. "그들이 행음하였으며 피를 손에 묻혔으며 또 그 우상과 행음하며.. (겔23:37)" 호세아서에서도 계속 말씀하시는것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호14:1)" 즉 우상숭배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것을 말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지중에 하나님을 떠나서 나중심의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또 찾고 해야할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야4: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위의 문구는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다음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베드로전서에서 다시 한번나옵니다.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복음"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1:23-25)"

이사야서 40:8절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좋은 의미일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수도 있습니다. 저의 생각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스스로 구속이된다는것입니다.

생명의 법(복음)도 영원한것처럼 사망의 법도 영원합니다. 사망의 법 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가 될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 사망의 법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겠지요.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베드로는 본문에서 생명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성을 설명했지만 상대적으로 사망의 법의 영원성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할것 같습니다. 사망의 법안에서는 <죄가 왕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특성은 "(내가) 선과 악의 판단기준"이 되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법 안에 있다면 <은혜가 왕노릇>하게 되어있습니다. 즉, 우리가 생명의 법 안에 있다면 당연히 따라오는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생명의 법" 아래 있다는 증거일것 같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5:21)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히11:1절이 아주 유명한 성구입니다. 믿음을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이야기 하는것이 조금 이상하잖아요. 분명 믿음의 내용이 나와야하는것이 아닌가요? 히브리서 11장 이전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보면 바울이 말한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앞부분에 나온 어떤 제사장 예수님을 설명하는지 봐야할것 같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11장1절이 말하는 믿음이 분명히 무엇인지 알것같습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요?

1. 첫번째, 죄가 없으신 제사장 예수님입니다.

-옛날 대제사장들은 죄가 있어서 속죄제를 드릴때 자신부터 먼저 드려야 지성소로 나아갈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날마다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5-16)"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7:27-28)

2. 두번째, 영원한 제사장 예수님 입니다.

- 멜기세덱 제사장을 언급합니다. 이분은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습니다. 그는 족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없는 제사장이라고 말을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6:19-20)"

3. 세번째,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하늘의 지성소의 길을 열으신 제사장 예수님입니다.

- 우리를 거의 피로 거룩하게 하시고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갈수 있게 길을 열었습니다. 어떻게 지성소로 들어가냐면 바로 휘장을 지나서 갑니다. 그 휘장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실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부분이 나오잖아요. 바로 예수님이 지성소의 길을 열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10:18)

4. 네번째, 다시오실 제사장 예수님입니다.

-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있는 성소에계시고 재림으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실것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4,28)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7)

이 모든설명이 끝난 다음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히10:38)"라고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서 11장1절에 말하는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것들의 실상이요 보지못하는것들의 증거>이다.... 바로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관한 믿음같습니다. 따라서 의인은 제사장이신 중보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것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

구원을 이루어가라

구원을 이루어가라... 무슨뜻일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

빌립보서 2장12절과 베드로전서 2장2절...에서 이런말씀이 나옵니다. 과연 무슨뜻일까? 한번 평신도 수준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어려운 본문 같습니다. 저는 간단하게 생각해보았어요. 먼저는 빌립보서 2장에서 나오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지 모르지만 다양한 번역본을 참고하면 그나마 조금 알아가는것 같구요. 보통 글을 쓸때는 반복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정확하게 알려줄려고요. 그런 방법으로 접근해보았습니다.

영어성경 Good News Bible 로 보면 빌립보서 2장 12절은 사실 13절과 한문장으로 된부분이 있습니다.

Keep on working with fear and trembling to complete your salvation, because God is always at work in you to make you willing and able to obey his own purpose.

이렇게 한문장이됩니다. 성경에서는 because 사이로 두개절로 나눠버렸어요. 따라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라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너희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어렵습니다. 빌립보서 3장으로 넘어가면 조금더 설명을 해주는것같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3:12) <I keep striving to win the prize for which Christ Jesus has already won me to himself>

위의 말씀을 보면 "상"이 나옵니다. 영어에서 보면 내가 계속적으로 이 상을 얻기(win)위해서 노력하는데 사실 이 상은 이미 예수님께서 나를 그에게 속하게 했던(won)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이것을 현재형으로 보지만 사실은 현재완료형으로 이미 얻어진것으로 본다는것이 재미있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이것을 어떻게 보냐면요.. 이미 이루어졌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do not consider)는 자세를 의미하는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한번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빌3:15)" 즉 이런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같습니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구원을 완성시키고 이루어 나아가는 주체가 사실 2장12절과 13절과 빌립보서 3장12절을 보면 결국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같습니다.

베드로전서2장2절에 나오는 <구원을 이루도록 자라>는 말씀은 그 뒷부분을 자세히 보면 건축에 관해서 설명을 합니다. 집을 지어가는데 너희도 "산 돌"같이 집에서 세워져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집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the spiritual temple"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전을 말합니다. 전체 건물에서 우리가 한나의 돌로서 집을 지어가는것에 비유를 합니다. 베드로는 개개인의 구원을 의미한것보다는 전체적인 교회를 세워나아가는것에 촛점을 맞춘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성전은 그리스도안에서 각자가 하나의 돌처렴 놓여지고 붙어서 큰 집을 세우는것과 같다는 건축의 관점에서 베드로는 설명을 한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생각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결국 베드로전서2장에 나오는 것은 고린도전서 3장9절에 나오는 부분과 연관될수 있을것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그러나 결국 이것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3:6)" 역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심고 물을 주어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교회를 세워가는것도 하나님께서 세우지 아니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것 같아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2:5)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육체 vs 성령

육체 vs 성령...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생각해볼 문제가 하나 있어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려요. 그럼 우리가 보통하는일이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것입니다. 그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걸까요? > 답은? 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죠. 만약에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것이 아니면 결국은 "도 닦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성령을 따라 행하면 당연히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아요. 따라서 제가 하고싶은말은요.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절제한는것에 촛점을 맞추지말고 성령에 촛점을 맞춰야한다는거에요. 그럼 여기서 "성령 충만"은 어떻게 받느냐는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충만은 어디서 올까요? 성경에서 그 예를 한번 찾아봤어요.

1. 기도할때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행8:15)

2. 안수기도받을때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8:17)

3. 말씀을 들을때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10:44)

4. 말씀을 선포할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13:9)

..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하냐면요. 바로 "기도"하는것과 "말씀"을 듣는것과 읽는것..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것에 집중하면 "성령충만"해집니다. 이렇게 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을수가 있는것 같아요. 생각보다 간단하지요? 그러나 기도도 힘들고 말씀읽는것도 쉽지가 않네요.

주 안에서 자랑

주 안에서 자랑하라...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4-5)

우리는 자신의 "자존감"을 우리의 모습속에서 찾을경우가 많다. 물론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의 자랑할것이 많고 능력도 참많을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할려는 싸움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 싸움은 육으로 할수 없다고 바울은 강조를 합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성경에서는 싸우는 무기로 "말씀"을 언급한적이 있구요. 그리고 "복음"을 말할때도 또는 "성령"을 언급할때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정확히 본문에서 어떤것을 말하는지는 알수 없으니 이것은 절대로 사람따라 바꿔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도 덜도 자랑할것이 없고 오직 <싸우는 무기>만 자랑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럼 전부 같은 무기 가지고 있는데 누가 더 잘났다고 말할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안에 있는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할까요? 주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말이니.. 자랑해도 주님만 자랑할것같습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복음, 주님의 성령... 이것만 자랑해도 시간이 없을것 같습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

어린자와 장성한자의 기준

어린자와 장성한자의 기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후13:11)

성경에서 어린아이와 장성한자에 대하여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론 성경에선 어린아이를 좋게 설명을 하지만 이번엔 바울이 어린아이와 장성한자를 비교를 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자 한번 생각해봐요. 지금 바울이 어디에서 이말을 하는지를요. 바로 고린도후서 13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슨 장이냐면요.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 앞뒤에 뭐가 있을까요? 바로 은사입니다. 은사에 관한 설명이 바로 12장 14장에 나와 있어요. 13장은 사랑에 관한 설명입니다. 이상하죠? 왜 은사 를 설명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갑자기 넣은것일까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의 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은사가 그럼 어린 아이의 일인가요? 분명 아니죠? 바울은 설명합니다. 은사는 좋은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일"은 버리라고 합니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가 뭘까요? 어린아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장성한자는 교회의 유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이 바로 어린아이의일과 장성한자의 일의 기준입니다. 재미있죠? "<사랑을 따라 구하라>.. (고전14:1)" 은사가 개인에게 분명히 유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구하고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장성한자의 일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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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에서 자유자, 자유자에서 화목하게하는자

노예에서 자유자로 자유자에서 화목케하는자로 부르심...

로마서는 법을 이야기하면서 절대로 풀려날수 없는 우리의 신분이 "노예"였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자유자"가 되었는데 이렇게 자유케한 이유가 바로 "화목케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부탁하기 위해라고 고린도후서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꼭 영화 "글라디에이터(검투사)" 줄거리 보는듯하네요. 글라이에이터 영화에서보면 사령관이였던 사람이 황제가 바뀌자 바로 사형선고가 떨어집니다. 그가 자유할수 있던 유일한 방법이 "죽음"입니다. 황제는 그가 죽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쫓지 않은거에요. 이게 비슷한데요. 우리가 사망의법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죽음"입니다. 근데 우리가 안 죽은거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 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4, 17 )

앞글의 댓글을 인용하면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국의 노예로 있었어요. 이들이 나오는 유일한 방법이 유월절 피 바름(죽음)입니다. 즉 죽었다는 상징(피)를 바름으로 사망의 법이 (Passover) 넘어감이 일어나는것입니다. 사망의 법이 우리를 공격할수 없는 분명한 이유는 우리가 죽지 않았지만 죽은자로 여긴다는것입니다. 왜요? 바로 예수의 피로 옷입혀져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망의 법이 우리를 공격할수 없습니다. 왜냐? 우리가 죽은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무엇이냐면요. 그 때는 하나님은 성전(지성소)에 거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지성소)에 갈려니 율법을 따라야 했어요. 하지만 십자가(죽음)의 사건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 으로 "하나님 나와 함께"한다 우리가 "성전"이 된거에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율법"이 아니고"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방법이 "성령의 인도"라고 말하는것이에요. 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것이 문제인데 지금은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계시니 <성령의인도>를 받는거라는거에요. 이것이 믿는자의 특권이고 축복이지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하여 알아봐야할것 같아요. 노예에서 자유케하신 이유인데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에게 한가지 직분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케하는 직분"입니다. 무슨일을 하는 사람이냐면 바로 화목케하는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부르셨어요. "화목케하는 말씀"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이웃에게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길"인 복음을 전하는거에요.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기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나리로다 (고후6:2)"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이렇게 좋은 직책을 맡은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바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고후6:3)" 예 맞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모든 삶의 방법이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화목케하는 직분"이 훼방받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우리의 직책은 "화목케하는 직책"이고 우리의 삶의 방법은 "화목케하는 직분이 훼방받지 않게한다"는 것이 삶의 방법이에요.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이웃에게 복음전파가 방해 받지 않게하는 삶이 바로 화목케하는 자의 삶인것 같습니다. 우리 함께 이직분을 잘 감당해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법이 아닌 이 화목케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삶으로 살아가는거에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삶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역사하길 기도해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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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대가는 죽음

자유의 대가는 죽음

로마서를 읽다보면 대부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로마서는 법과 법의 싸움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닙니다. 로마서에 정말 크게보면 3가지의 법이 나옵니다. 바울은 법이란 개념을 들고와서 "종/노예"란 말로 법의 구속력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속박된상태를 "노예"같은 상태라고 말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노예"가 되어 있을까요? 이것이 로마서에 흐르는 큰 줄기 같은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7:1)"

노예의 정의를 보면 "타인에게 얽매여 있거나 행동의 자유가 없으며, 자신의 인격과 행동이 전적으로 주인과 소유자에게 달려 있는 사람을 말 한다. 자유인의 반대이다" 라고 나옵니다. 만약 노예들이 주거지를 주인의 허락 없이는 떠나면 바울이 살았던 시대인 로마 식민지 시대에서는 대부분 공개처형 당할 시대였던것 같습니다. 이 노예의 개념을 로마서에서 많이 이용을 합니다. 즉 노예는 죽기전에는 절대로 자유를 할수 없습니다.

자 그럼, 로마서에서 총 세가지의 법이 나옵니다. 한번 고민해봐요. 조금 중요해서 먼저 이 법을 먼저 볼필요가 있어요 사실 가장 중요한 법이고 선행된 법이거든요. 그렇지만 잘 모르는 법입니다. 첫번째의 법은 "죄의 법" 입니다. 이 죄의 법은 사실 숨겨져 있어요. 잘 보이지 않구요. 그래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내가 "죄의 법"아래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게 문제에요. 이것을 어떻게 발견하냐면... 죄의 법이 있는지 몰랐는데... 자신이 죄의 법 아래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고백합니다. 두번째법인 율법을 통하여 알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게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죄의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죄의 법"과 "율법"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6:6-7,18)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4)

두번째의 법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난다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숨은 기능>이 있는데 이것은 율법자체의 기능은 아니구요. 어떻게보면 당연한것인데... 사람이 죄인이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 없잖아요. 죽으닌깐요. 그런데 율법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법이면 당연히 사람들이 율법을 따르다보면 무엇이 보이냐면 <자신이 죄인인것이 밝히 드러나는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것으로 율법 자체는 선한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만나는 법이니 당연하겠죠. 그러나 율법을 거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자신속에 거하는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노예" 개념이 나오는데요. 바로 "자신이 원하지 아니하는데 행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법 아래 "노예"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죄의 법"이 자신을 속박하는것을 알게되는것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6-17)

이제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문제인것을 발견하고 자신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율법을 사모하지만 자신속에 "한 법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법이 바로 "죄의 법"입니다.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발견했으니... 바울의 고백이 어떨까요? 슬프지요... 맞아요 슬퍼요. 결국 말하기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바로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죄의 "노예"상태에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이렇게 말하는거에요.. 슬픈거에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죽기전에는 벗어날수가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3,25)

이제 세번째 법이 나옵니다.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 입니다. 간단하게 생명의 법 또는 은혜의 법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죄의 법을 벗어날려면 죽음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갈려고하니 율법이 가르쳐 주는 길을 가야하지만 갈수도 없고 이게 참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는것인데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가면 바로 생명의 법이 나옵니다. "죄의 법"에서 자유할려면 "죽음"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전체의 죽음으로 자유할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법"은 성경에서는 "아담 한명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한것처럼 한 사람으로 죽음과 부활로 모든 사람이 죽고 산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바로 "죄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고 또한 율법(하나님을 만나는법)의 요구 조건도 동시에 충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19)

따라서 로마서는 결국 두가지의 법의 싸움입니다. "죄의 법"과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법(십자가)"이 "죄의 법(원죄/자범죄)"에서 우리를 '자유'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법인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생명의 법"이 우리를 성령으로 하나님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율법을 따라 살지않고 생명의 법아래서 "성령"의 인도함으로 따라 산다고 고백합니다. 더 감사한것은 전에는 죄의 "노예"의 신분이였는데 그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준것도 감사한데.. 이제는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은혜" 그 자체라고 하는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7: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

나의 달려갈 길

나의 달려갈 길....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사도행전의 중심적 인물이 아마도 바울일것같습니다. 사도행전 28장까지 있지만 사실 20장에서 거의 끝난다고 볼수 있는것은 20장이후로는 그가 로마로 잡혀가는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내가 달려갈 길"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면 뒤에 부분에 사명이 있기에 보통은 달려갈 길과 사명을 같이 생각할수 있지만 다를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여기에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과 비교를 하면 "나의 달려갈 길"이 조금더 유추해 볼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4:5)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아마도 죽기전에 쓴 마지막 편지 같습니다. 그가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부탁을 합니다. "고난"을 받고 "전도"를 감당하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비교해보면 앞에 나온 "나의 길"과 뒤에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 나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나의 길이 저는 <고난의 길>이였지 않을까 유추해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그리고 바울의 마지막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하는 말이 <달려갈 길을 마쳤다>라고 합니다. 복음증거는 디모데에게 계속 부탁을 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나의 달려갈 길은 분명히 그의 인생(고난)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이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은 달려왔던 그 고난의 길을 이제 마친다는 표현으로 쓴것 같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은 고난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나의 인생에 고난이 많다면 어쩌면 나는 잘 가고 있는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바울은 <고난의 길>을 걸은만큼 그는 <위로의 길>도 걸었던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1:5)

말씀에 붙잡혀

말씀에 붙잡혀...

우리는 말씀을 붙잡고 삽니다. 분명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말씀을 붙잡을때 이게 좋은것인데 이상하게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만 선택적으로 붙잡을수도 있는것 같아요. 물론 없는것 보다는 훨씬 좋은 것같아요. 하지만 조금더 생각해보면 어쩌면 말씀이 우리를 붙잡고 가는것 같아요.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를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나옵니다. 저의 생각엔 내가 말씀을 붙잡아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한가지 문제에 부딛칩니다. 바로 사역이 "일"이 된다는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가는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끌어가는듯한 느낌을 받을수 있고 얼마가지 못하여서 힘이 빠집니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내가 말씀을 붙잡아 가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붙잡아 가는지"가 바로 한가지 이유일수도 있을것같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행18:5)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바울의 전도는 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라" 그리고 구원받을자가 많다고 말합니다. 근데 재미있는 부분은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다?" 이부분이 궁금합니다. 과연 우리가 전도를 할때 우리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지.. 그럼 이 말씀이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를 했어요. 우리가 전도를 할때 그 어떤것도 "주님을 향한 열정" "영혼에 대한 마음"을 막을 그 어떤것도 없다라구요. 물론 주님께서 도와주실것입니다. 그럼 그 고난은 무엇인가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선물이라고...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후1:5)"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라고 바울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아니할찌라도 우리는 전도를 멈추면 안되는것 같아요.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18:9-10)

특별히 고3때 많이 외우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 이 말씀의 앞부분이 궁금하지 않나요? 사도행전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그런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앞부분을 읽어보면 우리의 생각하고는 조금 다름을 알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다는 말을 쓸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어떤형편을 내가 만나도 상관없다. 좋은환경을 만나도 어려운 형편을 만나도 배고프고 가난해져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붙잡혀"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표현한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말씀에 붙잡힌 바울은 "주님을 향한 열정" "복음에 대한 열정" "영혼에 향한 마음"을 멈출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다"라고 고백하는것 같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주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영광된 삶일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 영광된 삶을 살았던 바울의 삶... "모든것을 할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쉽게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이 삶이 영광스런 삶으로 언젠가 저에게도 다가오는 날이 있겠죠? 아래의 글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보다 더 고민하는것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삶이 아닐까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3-28)

성령행전

성령행전...

참는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말씀중에 이런 구절이 있나요? 비슷하게 의역은 할수가 있을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무엇이냐고 하면 우리는 참 많이 참을려고 합니다. 거의 성자의 수준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끔합니다. 무엇에 대하여 우리는 참을까요? 사도행전의 때와 지금을 비교해볼려고합니다. 사도행전 1: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증인이 된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께서는 이것이 꼭 "말하는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았을때 말하는 아니하는 수준이 바로 성자의 수준이라서 문제가 되는것 같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특별히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으로 바꿔서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볼수도 들을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와 성령님을 땔래야 땔수없는 관계입니다. 그럼 성령이 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구원자)로 인정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아가게 된다는것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알게되었을때 우리는 보통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있는 분들은 특별히 딸을 두고 있는 분들은 딸 자랑을 매일 합니다. 그래서 "딸 바보"가 되어갑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 바보"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22:43)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26)

따라서, 위의 말씀을 보면 성령시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알아가고 그래서 입이 근질 근질해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속에서 성인의 향기가 납니다. "참는자에게는 복이있나니..."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예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과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것을 바라봅니다. 정말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할까요? 성경말씀을 비추어보면 그런것 같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15:26)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행4:19-20)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앞에서 섰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행5:17)" 제사장이 말을 합니다..."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5:40)" 절대로 예수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럴때 우리는 아마도 그만둘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만두지 아니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령행전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증거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너무 조용합니다. 우리는 다른곳에 관심이 너무 많아요. 우리는 불의를 보면 이야기하고 흥분하고 공의를 외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용해집니다. 예수를 증거하지 않는일에 대하여는 너무 조용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어디를 가든지 예수를 이야기했던 사도행전이 지금 나의 삶이 다시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이 황폐한 나의 마음에 오시옵소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5:41-42)"

모세와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과 사도행전의 시작...
(모세와 예수님)

예수님이 부활후에 바로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제자들을 만났겠죠? 그럼 몇일동안 제자들과 있다가 올라갔을까요? 40일입니다. 이 40일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을 찾아볼까요? 40일동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저는 신구약을 비교하는 것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그래야지 전체적인 그림을 가질수있고 바르게 이해할수 있는것이 많은것 같아요. 그러나 저의 개인적인 묵상이니 깊이가 별로 없으니 간편하게 읽어주세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과연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 40일동안 무엇을 하셨는지 읽어보아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4-45)"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3)"

즉, 40일동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에대하여 기록한 것을 잘 가르쳤습니다. 이 본문이 궁금하셔서 그 당시로 돌아가서 다시 들을수는 없지만 우리의 친절하신 스데반 집사님께서 이것을 아주 길게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7장에 나오는 설교내용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쭉~ 해서 예수님까지 설교를 하십니다. 구약성경 전부 읽기 싫으신분은 이것만 외우셔도 구약성경의 핵심을 뚫을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것을 설교한 다음 돌을 맞으시고 순교하십니다. 이때 스데반은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일어 서신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벌떡 일어나신거에요... 얼마나 예수님께서 마음이 급했으면 일어나셨을까요? 아무도 모르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스데반의 설교내용이 예수님이 40일동안 가르쳤던 내용이였을것 같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7:56,59)"

그럼.. 이제 구약을 보겠습니다. 모세 이야기로 넘어가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인것은 많은 분들이 들어서 아실테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올때 유월절 피 바르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때가 바로 이스라엘의 유월절 쯤이에요. 그래서 구약의 유월절 다음날이 무교절인데요. 무교절은 곰팡이늘 넣지않고 빵을 만들어 먹는날이에요. 애굽 탈출을 기념하는날이지요. 이 신약에서는 이 무교절이 부활절로 생각하셔도 좋을것 같네요. 그리고 부활후에 40일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하늘나라 가시면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오순절은 그럼 어디서 나온것일까요? 구약에서는 이날이 칠칠절이라고 합니다. 이 칠칠절(7줄x7일=49일 다음날 50일)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여 십계명을 받은 날을 기념해서 드린다고 합니다. 재미있는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금식하면서 받은것이 십계명인데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40일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조심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제 구약에서 율법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나와서 광야 40년이 시작됩니다. 이때 "율법"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럼 신약에서는 무엇이 함께할까요? 오순절에 "성령"이 감림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광야를 함께했다면 신약시대인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실거라 저는 생각해요. 구약에서 3대 절기가 있습니다.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 정말 중요한 절기 입니다. 그럼 마지막 초막절은 무슨날일까요? 이게 예수님과 상관이 분명 있겠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신16:16)"

초막절은 속죄제사가 끝난 다음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축제같은 날인데요. 이것은 광야40년을 끝난것을 기념하는 날인 동시에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누리는 축복의 날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날에는 완전한 승리가 있는날이고 우리의 가나안인 천국으로 가는 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약에서 초막적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즉 심판의 날인동시에 완전한 안식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절기가 정확하게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기하죠? 구약에서 천국의 상징인 초막절(추수감사절)을 기념하며 살았다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야 할것 같습니다. 초막절에 했던일이 무엇인지 보면 참 재미가 있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신16:14)" 바로 즐거워하는 날인데 함께 즐거워 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정말 재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면 복음을 날마다 증거하는 삶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는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함께 즐거워하는 예수님의 재림이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재림을 기대하나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0:22)"

갈라디아서 2:20절 앞뒤말씀

갈라디아서 2:20절의 앞뒤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KRV)

참 좋은 말씀이고 우리에게 권면을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누가 자주 사용하고 어떻게 이해하는지 실제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어" 이런 경우가 생긴다. 성경말씀은 앞뒤를 봐야 정확한 이해를 할수 있다. 바울은 무엇을 못박았을까? 그리고 그는 왜? 그리스도안에서 산다고 말했을까? 신앙생활 잘해야한다고 종종 말하면서 위의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앞뒤 구절은 모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바울은 자신을 율법에 향하여 죽었다고 했다. 즉 십자가에 못박은것은 율법에서 의를 찾을려는 자신이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 산자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산자인가? 갈라디아서 2:20절이 나를 율법으로 이끈다면 우리는 잘못이해하고 있을수도 있다. 오늘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읂혜"를 생각해본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19-21 KRV)

옷을 찢다

옷을 찢다.

구약성경에는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옷을 찢습니다. 그 당시에 옷도 비샀을텐데... 그래서 옷을 찢는다는것은 대단한 표현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옷을 찢지 말고라고 나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그럼 옷을 찢는것을 하나님이 싫어 했을까요? 그럴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요엘2:13)"

옷을 찢으면 많은 사람들이 볼수가 있죠? 즉, 이 사람이 지금 하나님께 간구할것이 있는가? 애통한것이 있는가? 사람들이 주목할것 같습니다. 이부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 하라고 합니다. 예 그럴까요? 예수님의 기준은 "사람에게 보이려고"라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 하는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것을 말하는것같습니다. 저는 요엘서에 나오는 "옷을 찢지말고"를 이렇게 이해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 이런뜻이 아닐까요?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마8:15)"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6:1)"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마6:16)"

즉,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마음을 찢는것. 즉, 결과적으로 요엘서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선결조건이 "마음을 찢는다"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이것을 "심령이 가난한자"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습니다. 그때 진정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되는것 같습니다. 따라서 요엘2:28절 그 유명한 말씀을 다르게 표현해보면 "마음을 찢는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된다"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2:28)"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우리는 "옷을 찢는자"입니까? "마음을 찢는자"입니까?
하나님은 "마음을 찢느자"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습니다.

율법을 어기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방법

율법을 어기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방법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앞에 잡혀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3-6)"

율법을 너무 잘 알고 계신 예수님 어떻게 이 여인을 살릴까요? 율법을 거부할까요? 율법엔 뭐라고 나와있을까요?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절대로 살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율법이 시행될려면 한가지 더 요구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얼까요? 바로 "증인"입니다.

신명기 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예수님은 바로 여기를 집중공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한사람씩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간음한 여인을 잡아온 증인들도 떠납니다. 이제 예수님 혼자 남습니다. 율법을 시행할 조건이 만족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요 8:7-11)"

율법을 거스리지 않고 사람을 살린 예수님... 율법은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증인"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증인"인가요?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증인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네가 어디있느냐?"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범죄후에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기브온 계약

기브온 계약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기브온 거민과 계약을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여호수아 9:3, 9, 14, 15 KRV)"

1. 여호수아의 잘못
물어보지 않고 계약을 맺은 리더의 잘못이겠죠? 하나님께 물어보지 아니하고 기브온 거민을 살렸으니 분명 잘못된일같습니다. 나중에 이들때문에 베냐민지파가 망할뻔합니다.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 날에 베냐민의 칼을 빼는 자의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이니 다 용사더라 베냐민 육백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달을 지내었더라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 (사사기 20:13, 46-48 KRV)"

2. 하나님의 계획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숨어 있을수 있겠죠? 하나님은 기브온 거민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수도 있을것같습니다.
보통은 여호수아의 실수만 부각을 하는것 같아서요. 재미있는점은 기브온 거민들이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습니다. 이유가 멀까요? "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여11:19-20)" 그럼 기브온 거민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걸까요? 그렇다고 볼수도 있겠죠? 아마도 나중에 크게 쓰임을 받기 위함이였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인하여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돕는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기브온 사람 곧 삼십인 중에 용사요 삼십인의 두목된 이스마야며 또 예레미야와 야하시엘과 요하난과 그데라 사람 요사밧과 (역대상 12:1, 4 KRV)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편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과 미스바 사람들로 더불어 중수하였고 (느헤미야 3:7 KRV)기브온 사람이 구십 오명이요 (느헤미야 7:25 KRV)

율법(그림자) vs 율법(원형)

율법(그림자) vs 율법(원형)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까? 맞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율법이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니라서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니 너무 크게 생각 안하시고 가볍게 읽어주세요.

우리가 흔히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을 저는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림자는 본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림자의 기능은 본체로 인도하는 기능을 합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KRV)" 율법의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합니다. 즉 율법은 원래 율법의 본체인 그리스도의 그림자같습니다. 저는 이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한번 거론하길 원합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7 KRV)"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KRV)" 따라서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성경이니 율법의 본체가 예수님이라고 볼수있지 않을까요? ㅋㅋ

그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같습니다. 율법을 지켜야하느냐? 없다고 생각해야하느냐? 이 질문에 빠져버리는 것같습니다. 저도 물론 그중의 한명입니다.

저는 이부분에서 아주 상식적인 접근을 하려고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본체인 그리스도안에 있다 또는 온전한 율법을 따른다고 말할수있습니다. 이 뜻이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편지" 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린도후서 3:2, 3 KRV)" 마음에 적은 편지인데 하나님의 영으로 썼고 읽는 독자는 뭇사람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가지 기준을 마련해 볼려고합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행한다고 하면 이것이 정말 무엇을 위한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의 전공자였던 바이세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예수님과 대적하였습니다. 이게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율법의 본체인 그리스도를 율법의 전문가가 알아보지 못했을까? 신기합니다.

저는 여기에 판단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 KRV)"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래세인들은 율법을 지켰고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율법은 무엇을 드러내기 위함일까요? 바로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하고 지킨다고하지만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고 나 자신의 의만 나타난다면 우리는 한번 생각해봐야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가 그리스도의 율법 행함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8:9 KRV)" 그래서 율법을 준행함에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유익을 끼쳐야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은 어쩌면 그림자 율법을 뛰어 넘어 자유케 하지만 종종 우리를 더 구속하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은 우리가 율법을 행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까? 율법의 본체인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행함은 "그리스도"를 나타냄에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따라서 나는 어떤 율법을 행하고 있나요? 재미있게 부담없이 비판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