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2일 일요일

제사장의 나라 VS 거룩한 제사장

제사장의 나라 vs 거룩한 제사장

1.문제제기: 최정인 목사님께서 고민하고 계신것을 저도 한번 묵상을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6절에 나오는 제사장의 나라가 왜? 베드로전서에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바뀐것일까?라는 고민이였습니다. 원문해석은 안했습니다. 다른영어번역버전과 저의 상식적인 생각으로 깊지않게 추리해보았습니다.

1). 제사장의 나라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애굽기19:6)

2). 거룩한 제사장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2:6)

2. 한글과 영어의 번역이 조금씩 다를수도 있지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영어버전을 몇가지 비교를 해보았습니다. 재미있는점은 영어번역은 상당히 비슷하다는것입니다. 전체 문장은 KJV만 적어보았습니다.

1)제사장의 나라 (a kingdom of priest)
"And ye shall be unto me a kingdom of priests(제사장의 나라), and an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which thou shalt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출애굽기19:6KJV)"

다른 번역에서는 a kingdom of priests (KJV, NIV, NASB) priests (GNB)
비슷하게 제사장의 나라 또는 거룩한 제사장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 거룩한 제사장 (a holy priesthood)
"Ye also, as lively stones, are built up a spiritual house, an holy priesthood(거룩한 제사장), to offer up spiritual sacrifices, acceptable to God by Jesus Christ. (벧전2:6KJV)"

다른번역에서는 a holy priesthood (KJV, NIV, NASB, GNB) holy priests (GNB)
이렇게 나오네요. priesthood를 제사장직으로 볼수도 있고 제사장들로 볼수도 있는 부분이 있네요. 영어의 문맥상으로보면 spiritual house 거룩한 집이 바로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동격으로 두었기에 이부분을 제사장의 나라로 번역하면 이상해지는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교회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거룩한 제사장(교회/개인)이라고 한국어로 번역한것같습니다.

3.출애굽 시대: 이때 당시에는 이스라엘 공동체 단위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유는 온 열방(나라)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는것에 두엇기에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사장이란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직접만나는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사이의 다리역할을 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온 열방나라의 제사장역할로 <열방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할을 강조한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축복과 저주도 함께 받았던것 같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여호수아9:24)"

4. 신약시대: 신약시대에는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교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기에 개인에 중점을 두고 번역하지 아니하였을까 그리고 구원이 공동체에게 역사하는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으로 고백하는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개인의 구원을 더 중요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바르실래

잔치에 참석하지 아니한 사람
(바르실래)

1.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요단강 건너 5Km쯤에 있는 마하나님에 머물때입니다. 다윗은 잠시후면 압살롬과 큰 전쟁을 치뤄야합니다. 이번 전쟁은 압살롬이 유리한 전쟁이였습니다. 다윗과 함께한 숫자는 압살롬과 함께한 숫자보다 적었습니다. 이때 다윗에게 나아와서 다윗에게 먹을것과 마실것을 제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이름이 <바르실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압살롬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다윗에게 도움을 제공한 사람들은 죽은 목숨이될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와줍니다. 만약에 이들이 없었다면 다윗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패전했을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삼하17:27-29)"

2.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제 다윗은 다시 요단강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려고 합니다. 바르실래는 왕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도록 끝까지 도와줍니다. 다윗은 그때 <바르실래>에게 말을 합니다.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내가 너의 여생을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바르실래는 다섯가지 이유로 거절을 합니다. 그리고 바르실래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지만 칭찬의 자리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나의 생명의 날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2). 나이가 많아서 분간을 할수없습니다.
3). 왕께 누를 끼칠수 없습니다.
4).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입니다.
5). 상이 너무 큽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1)*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2)*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3)*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4)*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5)*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삼하19:33-36)"

3. 당연히 누릴수 있는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상받는 자리를 거부했던 바르실래를 보면서 지금 현재의 우리의 모습과 비교하면 어떠한가요?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비하여 나의 공로에 대하여 인정함이 너무 작다고 화를 내거나 지체와 다툼을 할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게 누리는 것들은 사실 어디에서 온것일까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누리는것들 일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것들이 당연한것들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은혜가 날마다 나에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상급이 별로 필요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가 나를 어떤 자리로 이끌고 있나요?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를 상을 받는자리보다는 고난의 자리로... 정죄의 자리가 아닌 생명을 살리는 자리로 우리를 이끈다고 생각이듭니다. 나는 지금 어떤 자리로 가고 있나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4)"

*생각해볼점:
1.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하는것을 누리지 않음으로 지체를 높여줄수 있는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누리는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2013년 4월 27일 토요일

다윗의 범죄와 사건의 재구성

다윗의 범죄와 사건의 재구성
시간:저녁
장소:지붕(the roof of the palace)
지붕에 올라간이유: 범죄의 재구성의 핵심...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11:2)"

1.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사건의 발단은 왕궁 옥상에서 밧세바를 본것이 사건의 발단입니다. 이 본문에 대하여 이야기할때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원인을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지 아니함을 이유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다시 꼼꼼하게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을수 있으닌깐요. 정말 다윗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낮잠을 자다가 심심해서 옥상에 올라갔기에 범죄하게되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아니하였을까.. 생각해봤습니다.

2. 저의 생각은 다윗은 "기도"하러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근거1:시편55편은 다윗이 적은 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55:17)

다윗은 시편55편에서 그의 기도생활을 언급합니다. 저녁, 아침, 정오에 내가 기도하는듯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궁 옥상(지붕)에 올라간 시간이 바로 <저녁>입니다.

근거2:지붕에서 올라가서 기도하는것이 일반적인 일: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행10:9)

사도행전에서보면 제자들이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고 다니엘서에보면 다니엘이 하루에 세번기도할때 사람들이 다 볼수 있었기에 그를 고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다니엘도 사방이 뚤려있는곳(지붕같은곳)에서 기도하였음을 짐작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2. 기도하러 갔던 다윗이 범죄를 하다...이게 말이되나요? 제가 아는 어떤 친구가 이런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이 될때 그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닌하는 나의 모습을 볼수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55편에서 기도하로 올라간 이유가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근심하며 탄식하였는데 이유가 자신이 너무 원통하고 급박한 상황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이 지붕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의 모습에는 "근심하며 탄식"이 없었던것이 아닐까요? 저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많은 신앙생활의 모습이 분명 좋은것이지만 다시한번 내가 왜 이렇게 행하는 이유를 돌아봄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습에 조금더 가까워질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볼점:
1.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이 될때 무슨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마7:6,8)"
1

용감한 자의 리더 vs 환난 당한자의 리더

용감한 자의 리더 vs 환난 당한자의 리더

1.사울 (용감한자의 리더)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세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직책을 줄수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전쟁이 있었기에 그는 "힘 센"사람이나 "용감한"사람들을 그의 주변으로 불러모았습니다. 사실 용감하고 힘센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 너무 의지하다보면 중요한것을 놓칠수 있는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울 자신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일이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삼상14:52)"

2.다윗 (환난 당한자의 리더)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서 동굴로 피하여 다였습니다. 다윗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세상에 소망과 희망이 없는 "환난 당한"사람이나 "빚진"사람 그리고 "원통한"사람들이였습니다. 아무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기뻐하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것 같습니다. 사울왕에 쫓겨서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자같고 원통한 마음을 소유한 자신을 보았을것같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다르게 사람들을 의지한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봐주고 친구가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더 의지할수 밖에 없었을것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22:1-2)"

3.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때 많이 배운 학문이 있는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어부같은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함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고전1:27)"고 하신것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실력과 나의 주변환경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드러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 또한 가릴수도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집중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것 같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4:18)"

*생각해볼점:
1. 예수님은 주변 사람(환경)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마6:34)"

2.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집중하여야 할것은 무엇일까요?

"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61:1)"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

은혜를 기억한 사람들
(길르앗 야베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삼상31:11,13)"

1. 사무엘 이후로 처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사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한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사울 스스로 말을 합니다. '베냐민 지파 가족중 가장 미약한자'가 바로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사울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0:2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따라서 사울의 인기가 그렇게 좋은것은 아니였던것 같습니다. 이 사울의 인기를 한번에 바꾼 사 건이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였습니다. 암몬(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굴욕적인 계약을 하자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눈이 되는 조건으로 평화계약이 가능하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럴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도움을 요청하고 만약 도울 자들이 없으면 자신들이 외눈이되는 계약을 이행할려고 합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삼상12:2,11)"

2. 사울이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암몬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합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진정한 왕의 권위도 얻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도 구합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사울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 마지막으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자살을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시체를 발견하고 그의 갑옷은 자신들의 신전에 놓아두고 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 이말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자신들은 작은 마을 사람들이고 블레셋은 강한 나라입니다. 잘 못하면 다 죽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르얏 야베스 사람들은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서 내려고 장사를 지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그 은혜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것같습니다.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울의 은혜를 기억했던 길르얏 야베스 사람들은 그의 은혜를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사울을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함으로 대신합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다윗에게 들립니다. 다윗은 그들을 크게 칭찬해줍니다.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삼상31:12)"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삼하2:5)"

3. 우리는 사울이 나쁜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럴것 입니다. 하지만 사울을 위하여 슬퍼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다윗"입니다. 당대의 영적 지도자는 사울의 타락함과 죽음을 너무 슬퍼하였습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영적 지도자(조장, 셀장, 간사, 직분자, 목회자 등등)들이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할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앞에가서 용감하게 말해야할까요? 아니면 모른척해야할까요? 사무엘에게서 그 답을 찾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사무엘은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에게 이와같은 아픔이 없다면 우리는 회개하여야 할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앞에서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것이라 믿습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앞에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가 없다면 사람들앞에서 잠잠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15:11)"

*생각해볼점:
1. 그 은혜를 생각하여 밤새도록 달려갔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처럼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달려가야할까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1. 사무엘의 시대가 열리기전 엘리 제사장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낳은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주셨다고 한나가 하나님께 다시 드립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아들은 전쟁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목숨을 잃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았겼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엘리제사장은 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언약궤를 동일시 하였던것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을까요?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사무엘상 4:11, 22 KRV)"

2. 이제 사무엘이 제사장으로 직분을 다 합니다. 그가 했던것은 미스바로 사람들을 모아서 기도한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모여서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격을 옵니다. 절대절명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새롭게 사사가된 사무엘은 아직알려지지 아니한 사람이고 이스라엘에 언약궤도 없으니 사람들은 두려웠던것은 당연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블레셋은 천둥소리때문에 겁에질려서 도망을 갑니다. 사무엘이 그 이후로 법궤를 찾을려고 했는지 아니했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언약궤를 의지하는것보다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을 택한 사람 같습니다. 물론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엘리제사장의 두아들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않고 언약궤를 의지하는것보단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의지히는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잘나타나는것같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사무엘상 7:4, 5, 10 KRV)"

3. 지금 현재의 우리의 신앙에서 언약궤는 무엇일까요? 저의 생각인 우리가 의지할수 있는것 이라고 정의하고 본다면 아마도 "주일성수" "헌금" "전도" "봉사"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언급한 위의 몇가지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위의 몇가지를 의지한다고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볼수 없을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위의 것도 잘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잊지말아야할것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것같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KRV)"

* 생각해볼점:
1.그럼 지금 법궤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열왕기하 20:16, 17 KRV)"

신 벗김 받은 자 vs 기업 무를 자

신 벗김 받은 자 vs 기업 무를 자

1. 이스라엘 전통 중에 지금은 이해하기 힘든 전통 중이 "기업 무를 자"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재산 상속이 남자에게만 전해집니다. 그래서 가족중에 남자가 없으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기업 무를 자"입니다. 즉 가까운 친족(가족)중에 형제가 죽어서 대가 끊어질것 같으면 대신 그 가족의 대를 이어줄 자녀를 낳아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그 낳아준 자녀는 죽은 형제의 자녀가되고 재산도 나눠줘야합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신25:5)"

2. 구약성경에선 유다의 자녀중에 이런일이 있었고 그리고 룻기에서도 일어납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성경 부분이 룻기입니다. 룻기1장에서 사사가 치리하던 때에 흉년이 들어서 엘리멜렉이 나오미와 아들 둘을 이끌고 모압으로 가서 살게됩니다. 그곳에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합니다. 하지만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도 죽어서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되고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끝까지 따라갔던 며느리가 바로 룻 입니다. 이들의 삶이 쉽지 않았을것입니다. 룻은 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먹을것을 구하러가서 보아스를 만나고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를 위해서 "기업 무를 자"를 찾습니다. 하지만 그 기업 무를 자는 자신에게 재산의 손해가 나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보아스에게 그 의무(기업 무를 자)를 떠 넘깁니다. 신명기서에보면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한 사람을 "신 벗김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룻4:8)

3. 그리하여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어서 룻을 통해서 "오벳"을 낳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아들을 얻게됩니다. 이 옷벳은 결국 전통적으로는 엘리멜렉 과 나오미의 아들이 되느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엘리멜렉집안)는 보아스로부터 기업(재산)을 얻게됩니다. 이 기업 무를자의 의무를 다하여서 보아스와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게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신 벗김 받은 자"는 자신의 재산을 유지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한 사람이 되고 말합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4:17)"

4. 성경에서는 이 "기업 무를 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남자가 없는 집에서는 스스로 그 가정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유산상속이 남자를 통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이죠. 결코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기업 무를 자"가 있어야지만 그 가정이 이 문제를 해결할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문제를 해결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기업 무를 자"를 상징합니다. 레위기에서는 형제가 가난하여서 어쩔수 없이 땅을 팔았을 경우에도 그에게 가까운 사람(친족)이 대신 그 값을 지불하고 토지를 사서 돌려줘라고 합니다. 이 사람도 "기업 무를 자"입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해본다면, 복음을 몰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것이 지금의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부탁하신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케 하여야할 가까운이웃이 있다면 우리는 "기업 무를 자"가 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누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야 할까요?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25:25)"

*생각해볼점:

1.전통에 따르면 보아스가 에봇의 아버지가 될수가 없다. 왜냐하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는 보아스가 에봇의 아버지로 나온다. 이유가 뭘까?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1:5)"

2.보아스는 첫번째 기업무를자가 아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기업무를자가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자하는 숨은 뜻이 있을까?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룻3:12)"